[길섶에서] 보습의 노래/심재억 문화부 차장

[길섶에서] 보습의 노래/심재억 문화부 차장

입력 2005-11-01 00:00
수정 2005-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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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맑은 햇빛을 받은 논두렁 보습날이 각성처럼 반짝입니다. 어릴 적, 흙을 뒤집느라 닳은 그 무쇠 보습의 하얀 속살을 보노라면 불현듯 만져보고도 싶었습니다. 그 싱싱한 쇠붙이의 진실은 무언가와 뜨겁게 부대끼지 않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까요.

쇠를 녹여 지어낸 쟁기날을 보습이라고 합니다. 요새야 어딨는지도 모르지만 예전에는 쟁기없는 농사 엄두를 못 냈으니 보습이야말로 경작혁명이었겠지요. 쟁기에 그 보습을 갈아끼운 아버지, 추수 끝난 벼논을 갈아 엎습니다. 가을볕에 드러난 흙의 속살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솟고, 그 보드라운 흙 속에 묻혀 있던 살진 미꾸라지가 툭툭, 동강나 꼼지락거립니다. 뜨끈뜨끈 살아있는 흙의 생명력이 보습 아래 드러납니다.

차진 땅을 가느라 숨가쁜 소가 허연 입김을 토하며 힘겨워하면 아버지는 “그래, 쉬었다 가자.”며 논두렁에 앉아 탁배기 한잔으로 땀을 식힙니다. 그 한 컷의 바랜 기억은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제 의식 속에 진실의 실체, 자연에 대한 외경의 근거로 남아 있습니다. 새삼스럽게도 저는 지금 보습날 닳아 빛나도록 뭔가를 갈아 엎고 싶습니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2005-11-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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