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균형자論과 거간꾼의 지혜/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열린세상] 균형자論과 거간꾼의 지혜/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입력 2005-05-27 00:00
수정 2005-05-2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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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직후의 민주당정부 시절에 나온 ‘민족일보’를 보면 이 신문이 무슨 통일운동 단체의 기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신문은 시도 때도 없이 사설이나 기사로 통일문제를 다뤘다.

이 신문이 통일문제에 압도적으로 높은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사회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통일운동을 펴고, 이에 호응하듯 기성 지식인들도 단체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나섰으며, 진보정당도 제각기 소리를 높여 통일을 외쳐댔다.

이들 진보계열의 통일론은 각론에 들어가면 어느정도 차이가 있지만 주장의 핵심이 ‘중립화 통일론’에서 벗어난 경우는 없었다. 남한과 북한이 각기 미·소 양대 진영의 다른 쪽에 편입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위협이 되고 끊임없는 음모와 위험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통일한국은 국제적 동의 하에 중립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지였다.

이 중립화 통일론은 이론 자체로 보면 말 그대로 중립적인 것 같지만 당시의 국제관계를 고려한다면 반미적인 것이었다. 남한을 아시아대륙의 최전방 반공보루로 삼고자 한 미국으로서는 중립화 통일론이란 미국의 울타리에서 뛰쳐나가겠다는 배반의 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라오스 등 아시아 여러 나라가 중립화를 내세우며 일단 미국을 떠난 뒤 곧 공산화의 길을 택했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한국을 일본과 묶어 한·미·일 삼각체제를 굳히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민중봉기로부터 보호하기를 포기한 것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 삼각체제 구축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각체제에 대한 미국의 집념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엄청난 원조를 쏟아 부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며 지켜준 한국에서 지식인들이 중립화 통일을 부르짖는 것은 미국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이런 심리를 파고 든 것이 바로 박정희 군사정부였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서울의 미 대사관이나 8군 당국은 거병 자체가 미국의 군 통수권을 거역한 것이려니와 박정희 소장 자신이 여순반란 사건과 관련이 있고 가족 중에도 좌익 경력자가 있어 부정적이었다. 박정희 소장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은 5·16 직후 숨가쁜 상황에서 주한 미 대사관이나 미 정보당국이 국무부에 보낸 여러 기밀문서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국내 용공분자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여 미국의 환심을 산 뒤 삼각체제 구축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미국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후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는 월남전에까지 끼어들어 미국의 돈독한 신임을 얻었고, 이런 일련의 행보는 한국 자본주의의 획기적인 성장으로 보상받았다.

요즘 한·미관계가 다시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물론이려니와 미국의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도 한국에 대한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 아시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맡고자 하는 한국의 새로운 모색은 여전히 삼각체제에 집착하는 미국 사람들에게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전의 중립화 통일론이 배반의 논리였다면 지금의 균형자론 역시 미국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일 따름이다.

며칠전에는 미국의 한 고위 관리가 한국 정부의 균형자론에 대한 미국의 달갑지 않은 심사를 반영하듯, 이른바 ‘우범지대론’이라는 색다른 주장을 편 바 있다. 인근의 강대국에 시달려온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멀리 있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논리야말로 한국에 대해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에 편승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미국의 그런 패권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곱씹어 볼 사실이 있다. 자고로 훌륭한 거간꾼은 매매의 양 당사자가 모두 그 거간을 확고하게 자기편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다른편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중립적이라는 인상까지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우선 거간꾼의 그런 요령부터 터득할 필요가 있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2005-05-2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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