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이름자에 지은이의 바람이 담겨있듯, 역사용어에도 사가(史家)들의 지향이 실려 있다. 그때 거기를 산 이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오늘 여기를 사는 이들이 바라는 내일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다. 태평양전쟁과 대동아전쟁. 침략의 과거사를 성찰하는 이들과 분칠하는 이들이 기억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백인종 제국주의에 맞서 황인종의 번영을 지키려던 방어 전쟁이었다고 기억한다면 앞으로도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스스럼없이 되풀이할 터. 요즘 한참 일본의 역사왜곡을 둘러싸고 국제전과 내전의 포연이 가득한 이유는 침략의 과거사를 영광의 역사로 미화하는 교과서가 결과할 미래상에 대한 동아시아와 일본의 시민사회가 품는 우려 때문이다.
허동현 경희대 사학 교수 허동현 경희대 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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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경희대 사학 교수
허동현 경희대 사학 교수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집에 난 불이 아니다. 군국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에 대한 우리의 역사 기억도 합쳐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린다.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국민국가의 시대를 맞아 국민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였다.1919년 3·1운동 이후 그들은 아직 생기지 않은 나라의 모습을 놓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민족독립운동과 민족 해방운동. 역사가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을 꿈꾸느냐에 따라 역사책에 다른 이름이 올라간다. 민족과 민중을 내세워 어느 쪽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정당한가를 다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역사용어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
그시대를 산 이들의 머릿속에는 제방에 난 구멍을 고사리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이 땅의 사람들은 민족의 중흥을 위해 살아야 했다. 전체의 이름으로 낱낱의 희생을 강요하던 시절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신화일 뿐 아이의 손바닥 하나로 둑에 난 구멍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 이에 맞서 민중의 이름으로 새 세상을 꿈꾼 이들의 눈에도 개인은 비치지 않았다.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없다. 그때를 산 여성들은 남성보다 큰 희생을 강요받았다. 국가권력과 가부장권 두 개의 족쇄가 여성을 속박했다. 현모양처라는 말이 웅변하듯 여성은 민족과 민중의 이름으로 남성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라면, 오늘 우리의 지향이 썩지 않게 하는 성찰의 기억으로 역사는 쉼 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 생각과 지향과 이해를 달리 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우리는 꿈꾼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으로 갈라섰던 민족이 다시 하나되는 남북통일을 위한 역사 기억의 화해도 필요하다. 남의 잘못을 나무라기 위해서는 내 결함도 살펴야 하는 법. 반면교사로서 일본의 역사 왜곡을 보면서 우리도 타자와의 공존을 위해, 저항민족주의에서 기인하는 배타성과 우월의식 같은 우리 안의 특수를 어떻게 남의 눈을 감당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함도 절감한다.
오늘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연역적으로 만들어진 도식적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타자와 더불어 살기를 이야기하는 시민의 눈으로 본 역사책이 더 없이 필요한 때이다.
허동현 경희대 사학 교수
2005-05-13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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