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또 저물어간다. 형형색색의 가로수 불빛과 구세군의 종소리에서 세밑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올겨울은 경기불황 탓에 어려운 사람은 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다시 외환위기 때 수준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상위 10% 가구의 소득이 하위 10%에 비해 15배가 넘을 정도로 소득불균형 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실업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서민들의 삶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고달프다고 한다.
경기불황의 그늘은 소외된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들에게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노숙자, 조선족 동포, 외국인노동자, 양심수, 과중채무자들에게도 현실은 냉혹하다. 이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배려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해마다 12월1일자 신문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모금’ 사고가 등장한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보도도 이때부터 늘어난다. 그들에게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도록 사회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은 사회봉사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언론의 역할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보도를 보면 정작 소외계층은 소외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보도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서울신문이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게재한 소외계층 관련 기사는 모두 네 꼭지에 불과했다. 쓸쓸한 성탄절을 맞는 음성꽃동네를 다룬 ‘산타도 외면하나봐요’(25일자 9면)와 노숙자들의 캄보디아인 돕기 모금운동을 소개한 ‘세상 바꾸는 100원’(26일자 10면)은 그 중 눈에 띄는 기사였지만 통과의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언론이 자선 현장을 묘사할 때, 기부자나 봉사자에게 기사의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다. 기부자나 봉사자들에게는 ‘아름다운’이나 ‘따뜻한’ ‘천사’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반면 수혜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이나 유명인사의 사진찍기용 자원봉사가 지면을 차지할 때는 씁쓸함이 남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간의 훈훈한 공유 현장이 그려지지 못한다. 대신 양자가 이질적이며 상반된 대상으로 구별 지어진다는 인상이 든다.
세 번째로 기사를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겠지만, 소외계층의 현장은 비참하고 황량한 모습만이 강조된다.“기자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약자의 일상생활에 대해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이탈리아 ‘기자의무헌장’을 들지 않더라도 소외계층에 대한 선정적인 접근은 수치심을 조장하는 비복지적 행위일 것이다. 소외계층의 참상을 강조할 경우 “극빈자들은 어떻고, 장애인들은 어떠하며, 고아원은 어떠하다는 식의 고정관념만 사회에 부각시키게 된다.”는 복지 전문가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올해 세밑기사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따뜻한 얘기들이 지면에 많이 배었으면 좋겠다. 읽으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한번쯤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메시지를 담은 기사가 많아지면 좋겠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할 때도 공연장이나 각종 캠프, 외식장소 외에도 사회복지시설을 리스트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무엇보다 올해 말 서울신문에 불우이웃에 관한 기획기사 한 건쯤은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기부문화, 특히 부자들의 기부 실태를 심층취재해 보는 것도 세밑기사로서 의미를 가질 듯하다.
소외계층들의 세밑 삶은 어떠한지, 불황속 사회복지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연말에 걷히는 각종 기부금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제 수혜자들에게 전달되는지 독자들은 궁금하다.
천원주 한국언론재단 언론사업팀 차장
경기불황의 그늘은 소외된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들에게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노숙자, 조선족 동포, 외국인노동자, 양심수, 과중채무자들에게도 현실은 냉혹하다. 이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배려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해마다 12월1일자 신문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모금’ 사고가 등장한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보도도 이때부터 늘어난다. 그들에게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도록 사회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은 사회봉사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언론의 역할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보도를 보면 정작 소외계층은 소외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보도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서울신문이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게재한 소외계층 관련 기사는 모두 네 꼭지에 불과했다. 쓸쓸한 성탄절을 맞는 음성꽃동네를 다룬 ‘산타도 외면하나봐요’(25일자 9면)와 노숙자들의 캄보디아인 돕기 모금운동을 소개한 ‘세상 바꾸는 100원’(26일자 10면)은 그 중 눈에 띄는 기사였지만 통과의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언론이 자선 현장을 묘사할 때, 기부자나 봉사자에게 기사의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다. 기부자나 봉사자들에게는 ‘아름다운’이나 ‘따뜻한’ ‘천사’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반면 수혜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이나 유명인사의 사진찍기용 자원봉사가 지면을 차지할 때는 씁쓸함이 남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간의 훈훈한 공유 현장이 그려지지 못한다. 대신 양자가 이질적이며 상반된 대상으로 구별 지어진다는 인상이 든다.
세 번째로 기사를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겠지만, 소외계층의 현장은 비참하고 황량한 모습만이 강조된다.“기자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약자의 일상생활에 대해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이탈리아 ‘기자의무헌장’을 들지 않더라도 소외계층에 대한 선정적인 접근은 수치심을 조장하는 비복지적 행위일 것이다. 소외계층의 참상을 강조할 경우 “극빈자들은 어떻고, 장애인들은 어떠하며, 고아원은 어떠하다는 식의 고정관념만 사회에 부각시키게 된다.”는 복지 전문가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올해 세밑기사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따뜻한 얘기들이 지면에 많이 배었으면 좋겠다. 읽으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한번쯤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메시지를 담은 기사가 많아지면 좋겠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할 때도 공연장이나 각종 캠프, 외식장소 외에도 사회복지시설을 리스트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무엇보다 올해 말 서울신문에 불우이웃에 관한 기획기사 한 건쯤은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기부문화, 특히 부자들의 기부 실태를 심층취재해 보는 것도 세밑기사로서 의미를 가질 듯하다.
소외계층들의 세밑 삶은 어떠한지, 불황속 사회복지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연말에 걷히는 각종 기부금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제 수혜자들에게 전달되는지 독자들은 궁금하다.
천원주 한국언론재단 언론사업팀 차장
2004-12-0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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