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누구를 위해 새 도로를 냅니까/강형기 충북대 교수· 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열린세상] 누구를 위해 새 도로를 냅니까/강형기 충북대 교수· 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입력 2004-10-14 00:00
수정 2004-10-14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추석에 국도를 달려 고향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길이 참 좋아졌더라.예년에 비해 차가 쌩쌩 잘도 빠지더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종전에는 3시간30분이나 걸리던 청주에서 안동까지의 길이 2시간30분으로 단축됐다.서울에서 청송이나 영양에 출장을 가도 자고 올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힘들이지 않고도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도시에서 시골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길이 참 좋아졌고,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중앙정부는 각종 보조금과 교부금으로 지방을 직접 경영해 왔으며,국가경영의 기조와 핵심 내용은 토목사업을 벌이는 것이었다.토목사업은 국가 건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다만,토목사업이 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사업 추진의 기준과 성과를 개발 현장의 입장에서 고려하고 평가해야 한다.

개발 현장의 관점에서 고려해야 할 대표적인 사안은 국도의 직선화 사업이다.정부는 기름 값에 부과하는 교통세를 통해 매년 8조원에 이르는 교통특별회계를 편성하고 있다.그리고 이 돈으로 전국의 국도는 고속도로 못지않게 넓고도 반듯하게 펴지고 있다.1년에 한두 번 다니는 고향길이나 여행길이 좋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는 것도 교통특별회계 덕택이다.

하지만 문제는 발전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러한 길이 지방을 더욱 못살게 한다는 점이다.나는 지금 살고 있는 청주에서 고향 안동으로 갈 때 문경에서 자장면을 먹고 예천 장터에 들렀다가 풍산읍에서 강냉이며 찐빵을 사 먹는 정해진 코스를 되풀이했다.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잔잔한 맛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고속도로처럼 신호등을 없애고 제방을 쌓아 높게 닦은 새 국도가 행선지를 틀어버린 것이다.그렇게 많은 차들이 다녀도 시골 동네의 기름방과 인연이 있는 차는 별로 없다.넓은 새 길이 인간과 인간,지역과 지역,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인연을 끊어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길은 일종의 광장이었다.그래서 길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던 장소였고 인연과 인연을 이어주는 마당이기도 했다.자동차 시대가 되면서 길이 가진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국도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젖줄이었다.그러나 매년 소모하는 8조원의 재원이 우리에게서 인간의 도로,사람의 도로를 박탈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길을 바로잡아야 한다.어느 시대든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이제부터라도 지방의 도로는 쭉쭉 빠지는 길이 아니라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로 만들어야 한다.1년에 한두 번씩 다녀가는 사람이 편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길가에서 삶을 영위하는 ‘생활인’을 위한 길을 만들어야 한다.그리하여 우리가 지방을 다니면 국가나 국민이라는 개념으로는 떠오르지 않는 생활인들을 만날 수 있고,지역 주인공들의 마음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국도만이라도 기존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면서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지역의 흙과 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생태적 환경 속에서 생명을 잉태시키고,생명을 키우며,생명을 지켜 나가는 마을로 연결된 기존의 노선을 존중해야 한다.길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길이어야 한다.불경기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길이어서는 안 된다.교통특별회계로 책정된 8조원을 소화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누구를 위해 도로를 내는가.우리는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속도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 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2004-10-14 23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탈모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1. 건강보험 적용이 돼야한다.
2. 건강보험 적용을 해선 안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