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바닷가엔 낙서(落書)만 차곡차곡
피서객들이 돌아간 텅빈 바닷가엔 파도소리만 가득할 뿐. 수많은 발자국들이 찍힌 모래톱을 파도가 밀려와 지우면서 남기고 간 사연들을 씻어내고 있다. 눈부신 태양과 젊음과 낭만이 넘치던 바다. 피서지에서 생긴 사연들을 대천(大川)해수욕장 어느 대학생「티·룸」의 낙서판을 통해 모아본다.
5천명이 스쳐간 다방에 갖가지 사연 담은 책5권
3년전부터 『젊은이들의 광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대천(大川)에 「비치」다방을 시작했다는 이희조(李喜朝)(외대(外大)3년)은 텅빈 바닷가를 내다보며 올해「피서지에서 생긴일」들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아무렇게나 철한 두툼한 낙서책 5권을 내준다. 늦장마 덕분에 별로 재미를 못보았다는 올해 대천해수욕장 경기지만 그래도 5천여명의 젊은이들이 거쳐갔다는 「비치」다방에 그들이 남기고간 낙서사연들. 8절 백지위에 「사인·펜」「볼·펜」「매직·펜」만년필, 심지어는 연필까지 동원해서 끄적여 놓은 글과 그림들.
『이것들(낙서)을 보는 재미에 혼자 남고 말았읍니다. 이제 슬슬 나도 짐을 꾸려야겠읍니다. 올 여름 대천얘기는 이속에 다 들어있으니 읽어보십시오』
「비치」다방 주인겸 「마담」겸 「플레이어」인 이(李)군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리는 것 같다.
대천(大川)「비치」다방 주인겸 「마담」겸 「플레이어」이희조(李喜朝)군
즐겁게 놀기 전에 우선 네주머니부터 살펴봐라, 멍청아!
아마도 이 친구는 천방지축 모르고 놀다가 보니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빈주머니가 됐던 모양. 뒤에 오는 후배들을 위해 선배로서 충고하고있다. 그러나 이 선배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은 후래자(後來者)가 있었던 모양이다.
형님말쌈이 옳은 줄 미처 몰랐읍니다. 멍청한 놈 셋이서 돈 털리고 알거지가 돼서 쫓겨 갑니다. -20·얼간이 3형제
얼간이 노릇 하고 간 친구가 이들 뿐만은 물론 아니었던 모양.
공갈조의 구애문(求愛文)도 있고 “왔노라 즐겼노라 가노라”
올해는 대천(大川)이 소천(小川)으로 변했구나. 멍만들고가는 사나이.
빈주머니를 달고 갈곳을 몰라하는 서글픈「캥거루」신세여!
오늘 가버린 세 마리 여우들. 어제 밤새 맥주 사줄 때는 한마디 언질도 없더니…
덕분에 중량급에서 초경량급으로 전락한 초라한 내 지갑.
즐거워야 할 피서지가 이상과 같이 주로「경제적」인 타격으로 우울하게 변해버린 경우도 많지만 색다른 이유 때문에 울고 간「케이스」도 많다.
살갗을 태우러 왔다가 마음만 태우고 가다.
제발 하느님이시여 이 못난 놈에게도 「걸·프렌드」라는「프레센트」를!
사람 환장하겄는디, 우짤고. 이 머스마들은 속 없이「코피」만 마시고 있을 참인가베.
바다에 오면 마음이 넓어지는 법. 소위「깡」을 부려보고 싶은 용기가 남녀 누구에게서나 절로 우러나오는가 보다.
E大생이 난생 처음 술을 마셨어요. 알딸딸합니다.
그이와 나는 3일 전에 만났어요.
다음날 「키스」할 뻔 했어요.
오늘 난 어떻게 해야 좋겠어요?
너는 뭐냐? 나는 나다. -배짱
네것이 내것이고 내것도 내 것이다. -도둑놈
구애(求愛)작전도 가지가지. 그럴싸하게 자화상을 「스케치」한 옆에다 친절하게 숙소 약도와 함께 서울집 전화번호까지 적어놓은 세심파가 있는가 하면, 단도직입적으로 자기에게 오라는 식의 반 공갈조의 협박구애문까지 있다.
새나라의 처녀들은 일찍 시집갑니다.
아직까지 「쥔 없는 몸」은 옆 「덴뿌라」집으로 연락바랍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질 좋은 「물건」다수 입하! 선착순.
빈털터리 한탄·우울한 푸념도 곳곳에
<찾습니다>
바닷가에서「척추」뼈 한개 잃었읍니다.
찾아주시는 분에겐 「갈비」뼈 한개 드리겠읍니다.
여관 207호실로
<자술서>
주소: ○○호텔 A특호실
성명 : 멀거니 (내가 항상 눈을 멀건히 뜨고 있어서 친구가 지어준 아호임)
상기 본인은 너무 외로와서 24일 밤12시부터 1시까지 고성, 괴성등으로 이름모를 처음만난 또한 친구와 주민(특히여자)들의 마음을 싱숭생숭「메이크」했기에 자술합니다. 현재 괴로움의 감옥에 갇힌 몸이오니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목말라 합니다.
낙서를 해놓은 걸 보면 대개 그 사람의 인품은 물론 직업까지도 알수있다고 한다. 학생이라면 전공하는 학과를 통해 세상을 풀이해보려는 본능이 있는가 보다.
제길! H₂O + NaCl + MgCl₂
…나+자외선=깜둥이+쓰리고+아프고… -서을공대
하필이면 비오는 날 태어난 죄로 소금을 빚어야 했고,
하필이면 해뜨는 날 태어나서「아이스케키」장수가 됐고,
하필이면 빚갚는 날 태어나서 거지가 됐고,
하필이면 구름 낀 날 태어나서 대천에서 우울해야하는 인과관계. -J대 철학과 K생
5권의 낙서집 가운데서 가장 통쾌하며 시원한 낙서는「하니발」의 명언을 이용한『왔노라! 즐겼노라! 가노라!』였다.
<대천에서 공영명(公英明)기자>
[선데이서울 71년 8월 29일호 제4권 34호 통권 제 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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