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된 공간… 금지된 욕망이 베일 벗다
달이 가득 차면 이지러져야 한다. 초생달, 보름달을 그쳐 그믐달로 사위어가는 달의 순환은 그 원리가 여성의 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달은 여성에 대한 비유이자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차면 기울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채우기만 하고 비울 수 없는 여성들이 있다. 깨끗한 피로 채워진 자궁이 매달 경혈을 거듭해야 하고, 그곳에 신성한 아이가 들어설 확률은 0퍼센트이다. 욕망도 자궁처럼 차오르지만 해소할 방법도 없다. 그녀들의 이름은 궁녀, 여성이지만 억압만 있을 뿐 욕망의 실체와 만나본 적 없었던 불행한 여성들, 그들이 바로 궁녀이다.
영화 ‘궁녀’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축시(丑時)가 되자 지밀상궁이 왕과 왕비를 깨워 잠자리에 들라고 고한다. 축시라면 새벽 한 시 즈음, 꾸벅꾸벅 조는 나이든 상궁 곁의 나인은 문틈을 열어 왕과 왕비의 교접을 훔쳐본다.“당신의 씨를, 왕손을 달라.”는 호소를 신음과 섞는 왕비를 보며 어린 나인은 호기심에 빠져든다. 성욕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차단당한 채 상상만 해야 하는 여인들. 이 첫 장면은 궁녀의 욕망이 어떻게 단속되고 처리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는 ‘궁’이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발효하는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성이 금지된 궁 안에서 몸 속 깊숙이 쌓인 욕망들은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물건을 훔친 자는 손목이 잘리고 처녀성을 잃은 나인은 참형에 처해진다. 수많은 법칙과 금기로 가득 찬 궁녀들의 세계는 자신의 욕망을 폭력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
히스테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녀들의 증세는 실상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욕망은 음탕의 결과가 아니라 자손을 잇고자 선천적으로 내재된, 너무도 근원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차단당한 성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나인에 대한 폭력 등으로 전도된다. 수백명의 나인 중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불과 10명 안팎, 나머지 나인들의 삶이란 고단하기 그지없다. 영화가 밀폐된 공간에서의 여성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은 내명부 여인들의 면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왕손을 낳지 못한 중전은 먼저 원자를 생산한 희빈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다. 왕이라는, 남근을 가진 유일한 남자,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단 한 남자를 둔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잔혹하다.
영화는 이 모든 행태를 귀신의 원한으로 풀어가지만 실상 그것은 귀신의 해코지나 저주라고 보기 어렵다. 궁안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해괴한 일들은 모두 사람의 소행이라 보는 편이 옳다. 혈기왕성하고 순결한 여성들을 궁 안에 가둬두는 순간, 단 한 남자만을 바라보도록 시선이 고정되는 순간, 도착은 시작되고 불운은 침잠한다.
아무나 아들을 얻을 수 없지만 누구나 아들을 원하는 상태, 자체가 일종의 광기이고 비정상이다. 결국 ‘궁녀’는 구중궁궐의 문을 켜켜이 닫아 걸어서 이 부패한 욕망의 공간을 격리시킨다. 조선조라는 시기만큼 이 도착적 공간은 아련하지만 어쩌면 이 억압과 도착은 여전할 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사후적으로 드러나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2007-10-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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