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도는 지성림문(至聖林門)에서 끝이 났다. 이 문은 원래 옛 노나라 도성의 북문에 해당되는 자리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자가 13년 동안의 주유열국을 끝내고 BC484년 68세의 나이로 고향인 곡부로 돌아올 때 사용했던 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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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제자들이 어째서 북문을 이용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가를 의아해하였지만 13년 동안의 천하유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공덕도 이루지 못하고 초라하게 상갓집의 개처럼 돌아오는 공자로서는 남의 눈에 띄지도 않고 스스로의 자괴감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처럼 북문으로 입성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한 것은 공자의 위대한 지성(至聖)은 오히려 68년간의 전생보다는 초라하게 돌아와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의 5년 동안의 짧은 후생에 완성된 것이었으니, 이는 마치 예수가 30살의 나이에야 공생활을 시작하여 3년 만에 그리스도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5년의 짧은 기간이야말로 성인으로서 공자가 완성되는 중요한 공생활 기간이었던 것이다. 이 5년 동안의 짧은 공생활 동안 공자가 한 일은 현실정치에 대한 집념을 완전히 단절하고 제자들의 교육에만 전념하는 한편 만인의 교과서가 될 경서들의 편전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13년 동안의 방황을 통해 공자는 실제로 현실정치를 통해서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성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처음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애공은 정치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정치란 신하를 잘 선택하는 일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도적들의 횡행을 근심하자 공자는 그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적어도 그대만이라도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도적에게 상을 준다하더라도 그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에게 한 가닥 미련을 갖고 있던 노나라 왕실과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노나라에서도 공자를 끝내 등용해 쓰지 않았다. 공자 또한 벼슬 구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사마천의 주관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공자가 지성림문이라 불리는 저 북문을 통하여 68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있었으므로 사기에 기록된 대로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듯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자에 있어서 새로운 부활이었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시대에는 이미 주실(周室)은 쇠미해져 있었고, 예·악은 황폐해졌으며, 시서(詩書)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래서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은·주의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 전기들을 정리했으며, 위로는 요순의 시대로부터 시작해 아래로는 진(晉)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정리 편찬하였다.”
2006-12-05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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