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1) 충북 단양군 피화기마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1) 충북 단양군 피화기마을

강성남 기자
입력 2006-11-20 00:00
수정 2006-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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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으로 들어가는 고개 위 국도변 휴게실에서 내려 보니 단양 읍내를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가 가을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 가늘게 보인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계곡엔 낮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원색을 잃은 단풍이 겨울 초입으로 들어선 계절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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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노부부 정길녀 할머니가 깊은 밤 화롯가에 앉아 귀가 어두운 김경호 할아버지에게 종이나팔로 동네소식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다정한 노부부
정길녀 할머니가 깊은 밤 화롯가에 앉아 귀가 어두운 김경호 할아버지에게 종이나팔로 동네소식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읍내 다리를 건너 초겨울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는 강변 갈대를 뒤로하고 영월 쪽으로 가다 가곡면을 지나 소백산 줄기 끝에 자리 잡은 용산봉으로 접어드니 하늘만 보이는 좁은 계곡 사이로 ‘피화기 마을 가는 길’ 표지판이 가파른 산면을 따라 난 콘크리트길 옆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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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수령은 알 수 없으나 근처에서는 제일 크고 오래된 엄나무와 주홍색 작은 재실이 있는 성황당이 마을을 무탈하게 지켜준다고 믿는다.
마을 사람들은 수령은 알 수 없으나 근처에서는 제일 크고 오래된 엄나무와 주홍색 작은 재실이 있는 성황당이 마을을 무탈하게 지켜준다고 믿는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산 정상 가까이에 가니 조금 경사가 완만한 곳에 슬레이트를 얹은 작은 토담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가 나타난다.

어릴 적 서당에 다녀 동네 선비라 존경받는 김경호(88)할아버지에게 특이한 동네 이름 내력을 물어보니 동네가 산중에 깊이 있어 화(禍)를 피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피화기(避禍基)마을이라고 불리고 실제로 6·25전쟁 때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가곡면소재지 옆 대대리에 많은 군대가 주둔했어도 군인 한 번 못보고 전쟁 소식도 모르고 살았단다. 지금도 근동 사람들에게 피화기 마을길을 물으면 정확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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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기 전에 겨울나기를 위해 장작을 집 한 쪽에 가득 쌓아야 한다. 오석구 씨는 이웃 어르신들 몫까지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
눈이 오기 전에 겨울나기를 위해 장작을 집 한 쪽에 가득 쌓아야 한다. 오석구 씨는 이웃 어르신들 몫까지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
나뭇짐을 한 짐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오며 “어떻게 오셨드래요?” 하고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묻는 장태일(73)할머니 얼굴을 보니 말투하고 얼굴 표정이 어디선가 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 외지 사람을 대하는 동네 분위기도 익숙하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동막골’ 영화에서 봤던 동막골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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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봄 밭에 뿌릴 씨옥수수가 김경호 할아버지 댁 사랑채에 가득 걸려 있다.
내년 봄 밭에 뿌릴 씨옥수수가 김경호 할아버지 댁 사랑채에 가득 걸려 있다.
깊은 산중 짧은 초겨울 해가 일찍 넘어가니 외지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한 둘씩 손에 주전부리 거리를 들고 김경호 할아버지 댁으로 모인다. 오랜 세월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진 화롯가에 모여 앉아 소주가 한 순배 돌자 옛 얘기를 꺼낸다. 부끄럽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김종례(81)할머니가 말문을 연다. 어릴 적 일제 말기에 동원되어 서울 노량진 근처에 있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인천을 통해 들어온 미군을 보고 놀란 얘기를 꺼내며 피화기 마을에 시집와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편안했던 삶을 자랑한다.6·25전쟁 중 이곳으로 들어온 김경호, 정길녀 노부부는 일제 동원을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결혼해 평북 회천에 살다 전쟁 중 월남하여 이곳에 자리 잡고 십남매를 키운 얘기를 하며 눈가에 고운 미소를 짓는다. 한 참 동안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외손과 친손자를 합치면 30명 정도 된단다. 마을 어른을 엄마, 아버지라 부르며 서울살이를 접고 귀향한 오석구(60)씨는 온갖 마을일을 돌보는 할아버지 마을청년이고 큰소리로 노래를 곧잘 불러 마을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귀염둥이(?)이다. 구성진 노래에 화롯가에 모인 노인들이 서툰 몸짓으로 어깨춤을 춘다. 깊은 초겨울 밤 산골 토담집 사랑방 화롯가에서 짙은 사랑과 인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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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화기 마을에서 제일 높은 용산봉 밑에 자리 잡은 진수 스님 거처에서 피화기 마을이 좋아 가끔 방문하는 산사나이들이 소주 한 잔 하며 찬바람에 언 몸을 녹이고 있다.
피화기 마을에서 제일 높은 용산봉 밑에 자리 잡은 진수 스님 거처에서 피화기 마을이 좋아 가끔 방문하는 산사나이들이 소주 한 잔 하며 찬바람에 언 몸을 녹이고 있다.
하룻밤 인연으로 처음 만난 외지사람을 어느새 ‘동생’ ‘동생’ 부르는 사람 좋은 오석구 씨가 산을 내려가려는 기자에게 서울에선 양심을 지키며 솔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살벌하다며 고운 마음으로 살라며 손을 꼭 잡는다.

내려오며 바라보니 산등성이 넘어 숨어 있는 피화기 마을이 영화 ‘동막골’에서 봤던 마을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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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50m 높이에 있는 피화기 마을 배추는 단단하고 품질이 좋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외지로 팔려간다.
해발 750m 높이에 있는 피화기 마을 배추는 단단하고 품질이 좋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외지로 팔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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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석양 끝자락이 남아 있어 파란 빛을 띠고 있으나 깊은 산골마을 저녁은 일찍 찾아온다.
하늘엔 석양 끝자락이 남아 있어 파란 빛을 띠고 있으나 깊은 산골마을 저녁은 일찍 찾아온다.
사진 글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2006-11-2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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