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37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

儒林(37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

입력 2005-06-28 00:00
수정 2005-06-28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


사마천은 공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왕도에서조차 학교의 수업을 존중하는 풍조가 사라졌음을 탄식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지어 사기에 넣음으로써 바로 이러한 경박한 시대를 향해 준엄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유림열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미지 확대
내가 공령(功令)을 읽으면서 국립학교의 교관(敎官)을 장려, 확대하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언제나 책을 내던지고 탄식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공자의 사후 학교 수업을 존중하는 학풍이 사라지고 학문을 장려하는 학교 교육용의 공령을 읽을 때면 견딜 수 없어 언제나 책을 던져 버리고 탄식하였던 사마천.

사마천은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학문이 끊기지 않고 유림의 숲을 이뤄 영원히 울울창창 뻗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유림열전을 이어간다.

“주왕조가 쇠퇴해지자 관저(關雎:시경의 권두시)가 나타나고 유왕(幽王:BC 781∼771 재위), 여왕(王:BC 878∼828 재위)이 무도했던 탓으로 예악이 파괴되었으니 제후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정권은 강국으로 옮아 갔다. 그래서 공자는 왕도(王道)가 쇠퇴하고 사도(邪道)가 일어나는 것을 슬퍼하는 나머지 ‘서경’과 ‘시경’을 정리해 예악의 부흥에 힘썼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성왕 순(舜)이 작곡한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석 달 동안이나 고기맛을 몰랐으며,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아 비로소 아(雅:정악)와 송(頌: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워낙 혼탁 타락해 있었으므로 그를 알고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몸소 70여명의 제후들을 방문해 보았으나 제대로 알고 예우해 주는 자도 없었다. 공자는 탄식하며 ‘나를 채용해 주는 군주가 있다면 반드시 한 해 안에 예악을 일으키겠다.’라고 말하였고, 노나라의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이나 나가서 기린을 잡자 ‘나의 도는 다했다.’고 한탄하였다.

노나라 사관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결국 ‘춘추’를 저술해 왕자의 도를 보여 주었다.‘춘추’의 언사(言辭)는 미묘해서 그 함축성이 원대하다. 후세 학자들은 이것을 주석(註釋)하고 해설한 사람들이 많다.…”

사마천은 이처럼 공자의 생애를 압축하여 공자가 역사서인 춘추를 쓰게 된 배경을 간단하게 약술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사마천은 공자가 죽은 후의 상황을 부연설명하고 있다.

“…공자가 사거한 뒤 70여명의 제자들은 천하로 흩어져 각국의 제후들을 방문했다. 그때 크게 된 사람들은 제후의 스승이나 재상이 되었고, 작게는 사대부의 선생이나 벗이 되었다. 혹은 숨어 버린 제자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자로(子路)는 위나라에 있었고, 자장(子張)은 진나라에 있었으며, 담대자우(澹臺子羽)는 초나라에 있었고, 자하(子夏)는 서하(西河)에 있었고, 자공(子貢)은 제나라에서 생애를 마쳤다.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오기(吳起), 금활리(禽滑釐)와 같은 인물들은 모두 자하나 혹은 그 동문한테서 학문을 배워 왕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 무렵 학문의 애호가로서는 위(魏)나라 문후(文侯)밖에 없었다. 그 이후 학문은 점차 쇠퇴해지더니 마침내 진나라 시황제에 이르렀던 것이다.…”
2005-06-28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결혼식 생략? '노웨딩'에 대한 여러분 생각은?
비용 문제 등으로 결혼식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노웨딩에 대한 여러분은 생각은?
1. 결혼식 굳이 안해도 된다.
2. 결혼식 꼭 해야 한다.
-->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