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퇴계가 종명하던 날 아침, 제자들이 스승의 운명을 점쳐보았을 때 나온 ‘군자유종’이란 점괘는 신통하게 들어맞는다.
바로 그날 밤 퇴계는 수를 다해 죽었지만 주자와 정이천의 풀이처럼 그 후광은 세월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다.
우선 선조가 부음을 듣고 곧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이라 작호를 내렸으며, 우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5년 후에는 도산서원을 세워 사액까지 하고,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내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유종의 후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의 제자와 문인들이 그 뒤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이어 나와 그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저서들이 학술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그 빛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까지 뻗쳐 퇴계학파의 결실을 맺은 것! 그리고 사후 500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퇴계의 사상이 바로 군자 퇴계가 남긴 진정한 광배(光背)인 것이다.
이처럼 주역에 몰두한 퇴계는 21세 때 용수사에서 내려와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며,24세 때 첫아들 준을 낳는다. 잠시 서울에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으나 도학을 기피하는 성균관의 경박한 풍조에 크게 실망한 후 두 달 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퇴계는 자신의 생활을 산거(山居)라는 제목으로 짧게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平生志願更難量)”
26살 때 지은 이 짧은 시는 퇴계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때까지 퇴계는 벼슬에 관심 없이 오직 ‘헤아리기 어려운 평생 하고픈 일’, 즉 이학(理學)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퇴계가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지방에서 실시하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그 다음해인 27세 때 일이었으니,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그야말로 초야에 묻혀 사는 산중거사(山中居士)였던 것이다.
12살 때 논어에 나오는 이(理) 자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문리(文理)를 터득한 퇴계는 오직 14년 동안 스승이나 벗도 없이 혼자서 거경궁리하였던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말은 일찍이 송대의 대유였던 정이천과 주자가 주장하였던 ‘마음의 긴장상태를 정신통일의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일종의 심법(心法)이었다.
퇴계는 이를 지경(持敬)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과 마음을 일심으로 몰두하여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이며, 잠을 잘 때는 오직 잠을 자는 일에만 열중하는 참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이러한 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2005-05-2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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