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배제의 사회

[열린세상] 배제의 사회

이영자 기자 기자
입력 2003-02-15 00:00
수정 2003-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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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판잣집이 다 없어지면 그 때 일본을 보내주겠다.” 70년대초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한국인으로 귀화한 당시 중국인 수녀 학장은 일본 수학여행을 중단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었다.그 말 한마디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처럼 일본을 가겠다고 한 학생들을 졸지에 부끄럽게 만들었다.30년이 지난 오늘,판잣집 대신에 노숙자가 많아졌고 해외 골프여행자들도 늘어났다.이 시점에서 그 분처럼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고,또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말에 큰 감동을 받았던 나 자신도 과연 그 뜻을 얼마나 잘 새기고 또 실천에 옮기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최근에 우리 사회는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는 구조로 고착되어 간다는 경고가 거듭되고 있다.그 실증적 근거를 굳이 제시할 필요도 없다.계급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세습적 신분계급사회가 되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기 때문이다.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소득격차가 얼마나 벌어졌고 분배구조가 얼마나 잘못되어있는지를 수치와 정책을 들어 지적하고 비판한들,기존의 부익부 빈익빈 체제를 근원적으로 깨뜨릴 수 없다는 기본적 합의(?)나 체념이 깔려 있는 듯하다.이 체제를 문제시하는 것 자체를 불경시하거나 심지어는 색깔논쟁으로 끌어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신자유주의가 20대80의 양극화된 계급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경고를,아니 그 세계적 현상을,‘지나친 비관론’으로만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란 말인가? 배제(排除)의 사회가 다수의 탈락자와 ‘쓸모없는 인간’을 양산하고,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노예노동이 확산되는 현상을 정말 당연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체제를 살리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서구에서 자유주의의 역사는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공리주의와 그 궤를 같이했었다.그런데 그 최대다수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노동계급으로 나타난 당시의 현실속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로부터 사회개량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이처럼 이념은 역사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자기모순을 드러낸다.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중산층을 몰락시키고 실업과 고용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가 과연 다수의 행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념과 정책을 말하고 구조를 따지기 이전에 양식(良識)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인간의 행복이 점점 더 부의 척도로 평가되고 그 부가 점점 더 극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상황에서 과연 그 극소수는 불편한 마음도 전혀 없이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보자.

평소에는 특권층의 일상을 살던 정치인들이 선거운동때만 되면 장바닥에서 서민들과 형식적인 악수세례를 ‘베푸는’ 모습은 역겹고 지겹다.게다가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는 그들과 허리굽혀 두 손으로 악수하며 황송해하는 서민들의 얼굴은 애처롭기만 하다.그들이 진정 다수의 서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이루며 지새워야 했을까?

노무현 당선자는 서민 출신이고 ‘서민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약자의 운명을 어렵게 탈출한 사람들은 처절한 경험을 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강자의 세계에 도전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을 것이라 믿기 쉽다.그런데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예들이 적지 않다.확실한 자기소신이 없는 한,오히려 강자가 향유하는 특권과 문화를 모방하는데 열중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중에 강자의 놀음에 길들여지기 십상이다.노당선자는 변호사가 된 이후 골프도 치고 요트도 타면서 한때 부자들의 문화를 즐겼던 것 같다.그런데 이제 ‘서민대통령’을 자처하는 그가 “노숙자가 다 없어질때까지 골프나 요트는 자제하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는 지나친 기대일까?

이 영 자
2003-02-15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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