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나무에서 배운다

[굄돌] 나무에서 배운다

박지현 기자 기자
입력 2001-04-16 00:00
수정 2001-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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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벼르다가 집 근처 야산에 올랐다.아직 눈꼽만한 잎들을 가지 끝에 오종종 달고 있어서 산 속은 훤히 들여다보였다.그러나 풋풋한 봄기운이 온 산을 감싸고 있었다.전날 내린 비로 땅바닥은 축축히 젖어 먼지도 나지 않았고 발걸음은 부드러운 쿠션을 밟는 것처럼 경쾌하기만 했다.이따금옆을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넉넉해 보였다.풋풋한흙내음에 나도 모르게 힘이 솟았다.멀리서 볼 때는 드문드문 보이던 진달래가 여기 저기서 가지 끝에 진분홍 꽃을 잔뜩 피워 올리고 있었다.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꽃잎마다함초롬히 이슬방울을 머금고 있었다.수십 개의 이슬을 달고서도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목련이나 개나리꽃보다 산 속에 숨어서 남몰래 핀 진달래가유난히도 순결해 보임은 웬일인지….

눈여겨보니 소나무가 많았다.발 밑은 작년에 떨어진 솔잎으로 가득했다.새로 돋아난 소나무 새순은 만지면 바스라질까 염려될 정도로 여리디 여렸다.그런데 뜻밖에 잎들이 서로 한 몸으로 붙어있는 게 아닌가.침엽수라 당연히 새순부터 서로 갈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원예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새로운 발견이자 놀라움이었다.그러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이 자연이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준비하고 있음을.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지금 나무들이 한창 가지 끝으로 물을 길어 올리고 연초록의 오종종한새순을 준비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저 작고 여린 잎들이 자라서 크고 탐스런 잎으로 변모하고 다시 큰 숲을 이루고,가을이면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그 과정에서 나무들은 비바람과 천둥 번개와 모진 가뭄과 온갖 벌레들의 시달림을받아야 하리라.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낸 자에게 오는 넉넉함과 평화로움.아주 평범한 진리를 새삼 산에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나무들은 특별히 누구의 보살핌도 없다.폭풍우에 가지가찢겨지면 찢겨진 채로,허리가 꺾이면 또 꺾인 채로 자신의삶을 꿋꿋이 지켜나간다.무성한 가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도 다투지도 성내지도 않는다.오히려 서로 얽혀 등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자신만의영역을 지키기 위해 눈을홉뜨고 있지 않은가.아직은 여린잎으로 숲을 이루지 못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문득 내 속이뭔가로 꽉 차 오르는 것을 느끼는 산행이었다.

▲박지현 시조 시인

2001-04-1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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