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초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인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대한문앞에서 연좌농성을벌이는 등 일제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선생은 서전서숙을 설립,독립운동가를 양성했으며 1907년 귀국,신민회를 결성해 총서기로 활동했다.경술국치 직후 서간도유하현 삼원포로 일가와 함께 망명,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 선생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를조직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했으며 대종교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만주일대에 흩어진 민족역량을 결집,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초대의장을 맡아임시정부 수립의산파 역할을 했고 통합임시정부 내무총장,국무총리,대통령직무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년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1940년 3월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인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대한문앞에서 연좌농성을벌이는 등 일제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선생은 서전서숙을 설립,독립운동가를 양성했으며 1907년 귀국,신민회를 결성해 총서기로 활동했다.경술국치 직후 서간도유하현 삼원포로 일가와 함께 망명,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 선생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를조직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했으며 대종교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만주일대에 흩어진 민족역량을 결집,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초대의장을 맡아임시정부 수립의산파 역할을 했고 통합임시정부 내무총장,국무총리,대통령직무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년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1940년 3월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
2000-04-0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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