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신 대진재,터키 지진재난에 이어 타이완 전 섬이 몽땅 침몰하는듯한 대참사가 일어나 세계가 경악과 비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최근에는 멕시코에서도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지구촌이 지진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구의 재앙은 천재만은 아닌 것같다.60억 인구의 자연훼손,오염,산업폐기물 투기,불법 매몰,마구잡이 간척및 굴착 등 인재에 자연이 노한 것이 아닌가하는 여론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타이완은 9월 21일부터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과 10일 동안의 크고 작은여진으로 사망 2,060명,부상 8,672명,실종 및 매몰 189명으로 집계됐으며 건물 6,100동이 붕괴·반파되고 5,398동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이 숫자는 정확치 않고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사망이 6,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니 얼마나 심각한가를 체감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타이완당국은 지진 구호를 위해 약 3조원(800억 타이완 달러)을 투입하고전국에 6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리덩후이 총통이 재난구제책을 발표하면서 재난지역에 군경파견,생필품 사재기 엄벌 등의 긴급조치를 취하고 있다.국민들도 재해구호기금으로 630만달러를 내놓았고 유력한 대선후보도 내년 대선자금 600만 달러를 전액 쾌척하였다고 한다.
이에 맞춰 우리의 119구조대가 현지에 급파되어 매몰돼 있던 소년을 무너진 건물속에서 구조했다.또 우리 국민 22만명이 모금한 성금을 주한 타이완대표부에 전달하기도 했다.이를 계기로 그동안 한국에 가졌던 타이완 국민들의 감정도 좋아져 타이완간의 항공협상이 재개되리라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정부도 9월25일 각의에서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밖에 각종 구호장비와 식량,가설주택,발전기 18대,그리고 건물 안전진단 전문가들과 훈련받은 개까지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은 1992년 중국대륙과 수교하면서 매우 성급하고도 미숙하게,일방적으로 사전 통고도 없이 쫓기듯 매정하게 타이완에 대해 단교조치를 취했다.금싸라기같은 서울 명동의 대사관 자리도 중국측 외교관이 급작스럽게 짐을 챙겨가지고 입주케 했다.이에 대한 울분과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타이완내 한국유학생들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교민들은 고개를 떨구고 골목길로만 다녀야 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신규식,이동녕,김구 등 40여명의 우리 애국지사는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를 수립하고 27년간 국민당과 함께 중국대륙을 이동하며 독립투쟁을 했다.이때 국부 쑨원(孫文) 총통이 임시정부 청사와 식량을 마련해줬고,그가 작고한 1925년부터 45년까지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우리 임시정부가 일제 강점하에서대표성을 갖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할수 있었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지장에서 순국한 이동녕 주석은 유언으로 이런 말씀을 남겼다.“우리가 일제에게 완전 점령당하지 않고 나라를 우리손으로 찾을수 있게 적극 지원한 것은 국민당 총통과 중국민이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
장 총통은 광복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수백만원의 건국준비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김구 주석은 환국할 때 장 총통에게 “27년 동안 도와준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예의가 바른 우리나라는 두고두고 갚을 것”이라며 그가 마련해준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특히 장 총통은 이봉창의거(1932년 1월 8일)에 이어 윤봉길의거(1932년 4월 29일)를 본 뒤 임정을 적극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우정과 신의,교류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타이완은 섬 자체가 침몰할지도 모르는 대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일제하의 어려운 시절,우리를 도와줬던 타이완의 재난과 참사를 결코 남의 나라 일로만 바라보고 있어선 안될 것이다./이현희 성신여대교수.현대사
그러나 이런 지구의 재앙은 천재만은 아닌 것같다.60억 인구의 자연훼손,오염,산업폐기물 투기,불법 매몰,마구잡이 간척및 굴착 등 인재에 자연이 노한 것이 아닌가하는 여론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타이완은 9월 21일부터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과 10일 동안의 크고 작은여진으로 사망 2,060명,부상 8,672명,실종 및 매몰 189명으로 집계됐으며 건물 6,100동이 붕괴·반파되고 5,398동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이 숫자는 정확치 않고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사망이 6,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니 얼마나 심각한가를 체감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타이완당국은 지진 구호를 위해 약 3조원(800억 타이완 달러)을 투입하고전국에 6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리덩후이 총통이 재난구제책을 발표하면서 재난지역에 군경파견,생필품 사재기 엄벌 등의 긴급조치를 취하고 있다.국민들도 재해구호기금으로 630만달러를 내놓았고 유력한 대선후보도 내년 대선자금 600만 달러를 전액 쾌척하였다고 한다.
이에 맞춰 우리의 119구조대가 현지에 급파되어 매몰돼 있던 소년을 무너진 건물속에서 구조했다.또 우리 국민 22만명이 모금한 성금을 주한 타이완대표부에 전달하기도 했다.이를 계기로 그동안 한국에 가졌던 타이완 국민들의 감정도 좋아져 타이완간의 항공협상이 재개되리라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정부도 9월25일 각의에서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밖에 각종 구호장비와 식량,가설주택,발전기 18대,그리고 건물 안전진단 전문가들과 훈련받은 개까지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은 1992년 중국대륙과 수교하면서 매우 성급하고도 미숙하게,일방적으로 사전 통고도 없이 쫓기듯 매정하게 타이완에 대해 단교조치를 취했다.금싸라기같은 서울 명동의 대사관 자리도 중국측 외교관이 급작스럽게 짐을 챙겨가지고 입주케 했다.이에 대한 울분과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타이완내 한국유학생들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교민들은 고개를 떨구고 골목길로만 다녀야 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신규식,이동녕,김구 등 40여명의 우리 애국지사는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를 수립하고 27년간 국민당과 함께 중국대륙을 이동하며 독립투쟁을 했다.이때 국부 쑨원(孫文) 총통이 임시정부 청사와 식량을 마련해줬고,그가 작고한 1925년부터 45년까지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우리 임시정부가 일제 강점하에서대표성을 갖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할수 있었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지장에서 순국한 이동녕 주석은 유언으로 이런 말씀을 남겼다.“우리가 일제에게 완전 점령당하지 않고 나라를 우리손으로 찾을수 있게 적극 지원한 것은 국민당 총통과 중국민이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
장 총통은 광복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수백만원의 건국준비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김구 주석은 환국할 때 장 총통에게 “27년 동안 도와준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예의가 바른 우리나라는 두고두고 갚을 것”이라며 그가 마련해준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특히 장 총통은 이봉창의거(1932년 1월 8일)에 이어 윤봉길의거(1932년 4월 29일)를 본 뒤 임정을 적극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우정과 신의,교류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타이완은 섬 자체가 침몰할지도 모르는 대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일제하의 어려운 시절,우리를 도와줬던 타이완의 재난과 참사를 결코 남의 나라 일로만 바라보고 있어선 안될 것이다./이현희 성신여대교수.현대사
1999-10-0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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