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총선을 7개월 앞두고 여야가 신당 창당과 새 인물 영입,제2창당을 서두르면서 유망한 지식인·전문가들의 정치참여문제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현 정치인들에게 21세기 국가운명을 맡기기 어렵다는 것이 국민여론이라면 인물교체는 당연하다.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정치혐오증과 무관심이 깊어지는 현상도 인물교체의 필요성으로 작용한다.
신당 창당이나 제2창당이‘그 나물에 그 밥’으로 간판과 메뉴만 바뀌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인적청산과 인물교체를 통해 정치가 활력을 찾고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국민통합과 새 천년을 이끌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그러자면 지식인·전문가들이 과감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인식변화가 중요하다.도덕적으로 깨끗하고 학식과 전문성을 갖춘 식자 중에는 정치참여를 꺼리는 사람이 적지않다.정치에 참여하면 피해를 당한다는 외상의식(外傷意識)이 작용하는 까닭이다.조선시대의 무오·갑자·기묘·을사 등 각종 사화와 붕당에 가담했던 사람이면 대부분 화를 입어 위방불입(危方不入)과 오불관언(吾不關言)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또한 역대 독재정권이 정통성의 포장용으로 차출(또는 자원)하여 방패막이로 써먹고 용도 폐기하거나 부정선거,인권탄압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참여지식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작용한다.따라서 순수한 지식인·전문가일수록 정치참여에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지식인 참여의‘원칙’과 관련해서 논어의 가르침 이상의 정답은 없다고 본다.
天下有道則見(천하유도칙견)無道則隱(무도칙은)邦有道 貧且賤焉 恥也(방유도 빈차천언 치야)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방무도 부차귀언 치야) 국가에 도가 섰을 때는 참여하고 도가 없을 때에는 은거해야 한다 도가 있는 데 빈천함은 수치이고 도가 없는 데 부귀함도 수치이다.
지식인의 참여가 선행일 경우와 악행일 때가 있다.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나 하수인으로 참여한 지식인이 후자라면 반독재저항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은전자라고 하겠다.아직 이들에 대한 공과가 가려지지 않고 단죄와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우리 지성계의 숙제로남는다.
지식인이 배운 학식과 재능을 후진교육과 함께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은당연한 일이다.‘국가발전’의 영역은 대학이나 연구소일 수도 있고 정부나공공기관 또는 국회일 수도 있다.문제는 어떤 자세로 어디에 참여하느냐다.
독재정권하에서의 정치참여는 어용지식인의 권력욕이지만 50년 만의 수평적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민주화시대의 정치참여는 국가에 대한 헌신이고 떳떳한 주권행사다.
드골정권의 문교상으로 입각한 앙드레 말로를 어용문인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없고,닉슨정권에서 국무장관이 된 키신저를 정치교수라고 험담하는 사람도 없다.페이비언주의자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케네디정부의 브레인트러스트를 어용으로 보거나 권력욕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선택한 권력이 정통성을 갖고 재야나 재조(在朝)에서나 신념과 원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참여는 지식인 참여의 성공한 모델로 남는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나 국회에 적잖은 지식인과 전문가가 참여했다.그렇지만 대부분 기성 정치인화,관료화하거나 독재권력의 이론가 또는악법 제정의전문가 역할에 그쳤다.정치발전의 역할은커녕‘한물에 휩쓸려’서 제도권으로 쉽게 응고되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지식인그룹이 정치에 참여하여 전문성과 참신성으로 비생산·파쟁·비능률을 불식시키고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잘못된 풍조가 정치의 저질과 후진성을 불러왔다.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이들에 대한 검증작업도 필요하다.현역 중에도 유능한 의원이 있고‘새피’중에도 낡은 인물이 있을 수 있다.철저한예비검증을 통해 깨끗한 정치인·전문성 있는 정치인들로하여금 새 시대를이끌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막스 베버의“정치가 그 고향으로 삼아 정착할 곳이 바로 도덕이다”란 경구를 정치인 검증의 첫 관문으로 삼았으면 한다./주필
신당 창당이나 제2창당이‘그 나물에 그 밥’으로 간판과 메뉴만 바뀌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인적청산과 인물교체를 통해 정치가 활력을 찾고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국민통합과 새 천년을 이끌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그러자면 지식인·전문가들이 과감하게 참여해야 한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인식변화가 중요하다.도덕적으로 깨끗하고 학식과 전문성을 갖춘 식자 중에는 정치참여를 꺼리는 사람이 적지않다.정치에 참여하면 피해를 당한다는 외상의식(外傷意識)이 작용하는 까닭이다.조선시대의 무오·갑자·기묘·을사 등 각종 사화와 붕당에 가담했던 사람이면 대부분 화를 입어 위방불입(危方不入)과 오불관언(吾不關言)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또한 역대 독재정권이 정통성의 포장용으로 차출(또는 자원)하여 방패막이로 써먹고 용도 폐기하거나 부정선거,인권탄압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참여지식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작용한다.따라서 순수한 지식인·전문가일수록 정치참여에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지식인 참여의‘원칙’과 관련해서 논어의 가르침 이상의 정답은 없다고 본다.
天下有道則見(천하유도칙견)無道則隱(무도칙은)邦有道 貧且賤焉 恥也(방유도 빈차천언 치야)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방무도 부차귀언 치야) 국가에 도가 섰을 때는 참여하고 도가 없을 때에는 은거해야 한다 도가 있는 데 빈천함은 수치이고 도가 없는 데 부귀함도 수치이다.
지식인의 참여가 선행일 경우와 악행일 때가 있다.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나 하수인으로 참여한 지식인이 후자라면 반독재저항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은전자라고 하겠다.아직 이들에 대한 공과가 가려지지 않고 단죄와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우리 지성계의 숙제로남는다.
지식인이 배운 학식과 재능을 후진교육과 함께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은당연한 일이다.‘국가발전’의 영역은 대학이나 연구소일 수도 있고 정부나공공기관 또는 국회일 수도 있다.문제는 어떤 자세로 어디에 참여하느냐다.
독재정권하에서의 정치참여는 어용지식인의 권력욕이지만 50년 만의 수평적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민주화시대의 정치참여는 국가에 대한 헌신이고 떳떳한 주권행사다.
드골정권의 문교상으로 입각한 앙드레 말로를 어용문인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없고,닉슨정권에서 국무장관이 된 키신저를 정치교수라고 험담하는 사람도 없다.페이비언주의자나 루스벨트 대통령과 케네디정부의 브레인트러스트를 어용으로 보거나 권력욕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선택한 권력이 정통성을 갖고 재야나 재조(在朝)에서나 신념과 원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참여는 지식인 참여의 성공한 모델로 남는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나 국회에 적잖은 지식인과 전문가가 참여했다.그렇지만 대부분 기성 정치인화,관료화하거나 독재권력의 이론가 또는악법 제정의전문가 역할에 그쳤다.정치발전의 역할은커녕‘한물에 휩쓸려’서 제도권으로 쉽게 응고되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지식인그룹이 정치에 참여하여 전문성과 참신성으로 비생산·파쟁·비능률을 불식시키고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잘못된 풍조가 정치의 저질과 후진성을 불러왔다.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이들에 대한 검증작업도 필요하다.현역 중에도 유능한 의원이 있고‘새피’중에도 낡은 인물이 있을 수 있다.철저한예비검증을 통해 깨끗한 정치인·전문성 있는 정치인들로하여금 새 시대를이끌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막스 베버의“정치가 그 고향으로 삼아 정착할 곳이 바로 도덕이다”란 경구를 정치인 검증의 첫 관문으로 삼았으면 한다./주필
1999-09-0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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