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마음/최인학(연변 조선족 1백년:1)

넉넉한 마음/최인학(연변 조선족 1백년:1)

최인학 기자 기자
입력 1994-10-14 00:00
수정 1994-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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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다리 휘게 손님 대접” 풍습 그대로/학술회의 쉬는 시간마다 술·음식

우리가 흔히 북간도로 불려온 오늘날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외롭고 고달픈 민족의 땀과 한이 얼룩진 수천리 밖의 북지다.그 미지의 땅을 찾아 이민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지도 어언 한 세기를 맞게되었다.그럼에도 거기에 뿌리를 내린 이른바 조선족은 중국속의 영원한 소수민족이다.서울신문은 그들 삶의 애환을 민족지(민주지)시각에서 추적,매주 금요일에 연재키로 했다.집필은 현지를 장기답사한 인하대 최인학교수(비교민속학)가 맡았다.

올해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방문한 것은 제1회 중국조선민족민간문예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연길시내 신화반점이 회의장소였는데 40명 정도의 학자들이 참석했고 이중에 22명이 주제발표에 나섰다.

민간문예는 구비문학을 말한다.문학성에 비중을 두어 구비문학이라는 명칭을 보편화 한 우리로서는 약간 생소했다.민간문예는 연희성을 더 강조한데서 붙여진 용어다.일본의 구승문예와도 맥을 같이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회의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의장이 상오회의를 종결했다.정확히 상오11시30분에 식당으로 몰려갔다.참가자 전원이 식탁에 둘러앉았다.『낮이어서 술은 약간 들겠습니다』라고 건배를 자청했다.그러나 사정은 사뭇 달라 독한 술병이 계속 비워졌다.음식 역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날라왔다.가져올 만큼 다 가져와야하는 접대모습 때문에 중간에서 그만 둘 수도 없었고,나중에는 채 비우지 목한 음식접시에 다른 음식 그릇들이 포개포개 쌓였다.

서울에서 학술회의를 자주 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대뜸 경비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참가비도 없고 요리는 고급인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그렇다고 연회상을 앞에 놓고 궁금증을 물을 수도 없다.꾹 참을 수 밖에.하오2시가 되자 분과회의가 시작되었다.소파에 앉아 정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술기운에 졸음을 참느라 고생했지만 그들은 늠름했다.낮술이 열기를 더 해 줬는지 회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하오5시가 되자 모두 식당으로 안내되었다.낮보다 성대한 만찬이 베풀어졌다.다음날도같다.더는 참을 수 없어 귓속말로 의장에게 물었다.『경비가 많이 드실 테지요』하자 의장은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북경(중앙정부를 지칭)에서 지원을 해주었으나 모자라서 몇몇 회사로부터 찬조금도 받았고,잡지사로부터 책을 내는 조건으로 공동주최를 한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북경에서 지원금을 받을 정도라면 이 회의의 성격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고 보니 연변 뿐아니라 요령·흑룡강성에서도 참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결국 동북 3성이 모이고 한국을 넣어 국제회의 성격이 되었다.처음 계획단계에는 북한 학자도 참석하기로 했으나 김일성사망으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설명이다.

어떻든 회의는 진지하게 진행됐지만 잔치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었다.일상 먹는 것보다 특별하게 차려 먹으면 그게 잔치가 아니겠는가.그렇지만 우리 시각에서는 과소비요 낭비임에 틀림 없다.얼마전 조선족의 박경휘씨가 쓴 「조선족의 미풍양속의 계승과 제거해야 할 몇가지 풍습」이란 글을 읽었다.이 글에는 장점과 단점을 명료하게구분하여 항목을 늘어놓았는데 단점으로는 첫째 대식풍습,둘째 허례허식 풍습,셋째 과소비풍습,넷째 체면과 겉치레 풍습,다섯째 어린이를 황제처럼 모시는 풍습의 5개항목이다.어쩜 한국인의 단점이라고 해도 무방 할 만큼 공감이 가는 항목들이 아닌가.「나쁜 버릇 개 줄까?」하는 속담이 떠 올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 한국은 현실적으로 빠른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데 비해 중국조선족은 그 속도가 느리다는 것 뿐이다.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식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 먹고 남아야 식성이 풀리는 것 아닌가.중국조선족 스스로가 악습이라고 하는 이 잔치의식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첫째는 대접정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우리에게는 가난한 선비 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깎아 술을 받아와 남편의 벗을 대접했다는 설화가 있다.대접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마음이 넉넉하지 아니하고서는 남을 생각할 수 없다.옛날엔 부인들이 끼니 때가 되면 이웃집 굴뚝을 버릇처럼 쳐다보곤 했다는것이다.만일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으면 양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 보리쌀을 바가지로 퍼다 주었다는 미담은 설화가 아니라 실화로 남아있다.

둘째는 넉넉함이다.우리가 생각한만큼 조선족은 가난하지 않다°그들은 우리처럼 자가용차나 개인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고,집안에 수세식 변소나 무엌에 냉장고가 없다 뿐이지 마음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그리고 최소한의 의식주는 넉넉하며 생활에도 불편이 없다.국민학교 학생들의 의복을 보면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아이들보다 한결 사치하게 입혀 놓았음을 알 수 있다.아이들의 얼굴도 명랑하고 동심이 활짝 피어 있다.백화점에 가면 전기제품을 비롯한 상품이 넉넉하지 못함을 실감한다.

그러나 시장거리를 가보면 야채가 풍부함을 느낀다.

셋째 황금만능주의가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아직은 위험선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곧 한국처럼 황금만능주의가 생겨 겉치레 경제가 만연해질까 걱정이다.그러나 한국처럼 오랜지족,야타족이 생겨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그것은 아직도 성인사회가 자녀들의 장래를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황금만능주의가 중국조선족에 파급된 요인은 한국 방문객 탓이라는 조선족 지성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인하대교수·비교민속학회장>
1994-10-1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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