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서 처음 벼경작… 철기·쌀 수출국/한반도서 처음 벼경작… 철기·쌀 수출국/문헌사료 절대 부족속 70년대들어 연구 활기
가야-.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가들에게 외면당한 나라.국내보다는 일본에서 관심이 높았던 나라.최근에는 유적발굴이 활발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나라.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
가야사 연구가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첫째는 문헌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을 들 수 있다.국내외 사료 가운데 가야가 등장하는 역사서는「삼국사기」「삼국유사」와 일본의「일본서기」,중국의「삼국지」「남재서」등에 불과하다.그러나 이들 사서도 대부분 자국과의 관계에서만 가야를 언급했을 뿐 가야사 자체를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다.그나마 11세기에 편찬된「가락국기」의 일부 내용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린 것이 유일하게 전해질 뿐이다.
또「임나일본부」설에서 보듯 가야의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다루려는 일본 학계의 공격적인 태도가 국내 학자들을 한동안 움츠러들게한 측면도 있다.그러나 70년대 들어 천관우의「복원가야사」가 나오면서 국내 학계의 연구도 활발해졌으며 특히 최근에는 옛 가야지역에 대한 유적발굴이 큰 성과를 거둬 사료부족을 보완해 주고 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여러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가야·가야·가야외에 구야(구사·구사)가라(가라·가양)가락등이 모두「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다.이밖에 일본서기등 일부에서는 임나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런 명칭들은 모두「가야」또는「가라」라는 음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인데 그 뜻에 대해서는 ▲갈래(분파) ▲강 ▲겨레등으로 해석하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가야는 삼한중 경상남북도 일대에 위치했던 변한의 소국들이 발전해 서기전후해서 연맹왕국을 이뤄 형성됐다(삼국유사에는 건국연대를 서기 42년으로 못박고 있다).연맹에 속한 가야제국의 수나 그 명칭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차이가 있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략 6∼12국 정도로 보고있다.
이 가운데 주요국가가 김해지방의 김관가야(별칭 구사·남가라),함안지방의 아라가야(안라),고성의 소가야,성주의 성산가야,고령의 대가야(가라),진주의 고령가야등이다.
이들 가야제국은 초기에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삼국및 낙랑,왜와 활발한 무역을 했다.주요 수출품은 이지역에 풍부한 철과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경작한 쌀등이었다.따라서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으며 당시의 수준 높은 문물은 가야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4세기초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뒤로는 크게 약화됐다.5세기들어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 479년에는 중국 남재와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가야제국의 소국들을 연맹체로 결속시켰던 힘이 무엇인지,3국과 달리 연맹 형태를 끝까지 유지했던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왜와의 관계에서도,가야가 왜에 철기및 농경문화를 전달한 것은 분명하다.또 가야의 독특한 무덤형태나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시기적으로 100∼200년 늦게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일본왕조는 한반도에서 3국의 등쌀에 시달린 가야주민들이 대한해협을 건너가 세운 일종의 정복왕국이 아니었을까.가야는 아직도 짙은 역사의 안개 속에 묻혀 있다.<이용원기자>
가야-.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가들에게 외면당한 나라.국내보다는 일본에서 관심이 높았던 나라.최근에는 유적발굴이 활발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나라.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
가야사 연구가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첫째는 문헌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을 들 수 있다.국내외 사료 가운데 가야가 등장하는 역사서는「삼국사기」「삼국유사」와 일본의「일본서기」,중국의「삼국지」「남재서」등에 불과하다.그러나 이들 사서도 대부분 자국과의 관계에서만 가야를 언급했을 뿐 가야사 자체를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다.그나마 11세기에 편찬된「가락국기」의 일부 내용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린 것이 유일하게 전해질 뿐이다.
또「임나일본부」설에서 보듯 가야의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다루려는 일본 학계의 공격적인 태도가 국내 학자들을 한동안 움츠러들게한 측면도 있다.그러나 70년대 들어 천관우의「복원가야사」가 나오면서 국내 학계의 연구도 활발해졌으며 특히 최근에는 옛 가야지역에 대한 유적발굴이 큰 성과를 거둬 사료부족을 보완해 주고 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여러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가야·가야·가야외에 구야(구사·구사)가라(가라·가양)가락등이 모두「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다.이밖에 일본서기등 일부에서는 임나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런 명칭들은 모두「가야」또는「가라」라는 음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인데 그 뜻에 대해서는 ▲갈래(분파) ▲강 ▲겨레등으로 해석하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가야는 삼한중 경상남북도 일대에 위치했던 변한의 소국들이 발전해 서기전후해서 연맹왕국을 이뤄 형성됐다(삼국유사에는 건국연대를 서기 42년으로 못박고 있다).연맹에 속한 가야제국의 수나 그 명칭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차이가 있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략 6∼12국 정도로 보고있다.
이 가운데 주요국가가 김해지방의 김관가야(별칭 구사·남가라),함안지방의 아라가야(안라),고성의 소가야,성주의 성산가야,고령의 대가야(가라),진주의 고령가야등이다.
이들 가야제국은 초기에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삼국및 낙랑,왜와 활발한 무역을 했다.주요 수출품은 이지역에 풍부한 철과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경작한 쌀등이었다.따라서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으며 당시의 수준 높은 문물은 가야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4세기초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뒤로는 크게 약화됐다.5세기들어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 479년에는 중국 남재와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가야제국의 소국들을 연맹체로 결속시켰던 힘이 무엇인지,3국과 달리 연맹 형태를 끝까지 유지했던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왜와의 관계에서도,가야가 왜에 철기및 농경문화를 전달한 것은 분명하다.또 가야의 독특한 무덤형태나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시기적으로 100∼200년 늦게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일본왕조는 한반도에서 3국의 등쌀에 시달린 가야주민들이 대한해협을 건너가 세운 일종의 정복왕국이 아니었을까.가야는 아직도 짙은 역사의 안개 속에 묻혀 있다.<이용원기자>
1993-07-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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