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동 「미장공 아줌마」 김납순씨/못다한 효도를 불우이웃에/막일하며 번돈 잔치성금으로/딱한 소년들엔 달마다 학용품/“10년뒤쯤 양로원 짓는게 꿈이에요”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오르간 반주를 따라 부르는 흥겨운 노래에 맞춰 너도나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간다.
하나같이 의지할 곳 없는 불우한 노인들이지만 이 날만은 남부럽지 않게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스스로도 어려운 형편이면서 때만되면 어김없이 이처럼 큰 잔치를 베풀어주는 사람은 놀랍게도 「미장공 아줌마」였다.
14일 낮12시 서울 도봉구 우이동 C음식점에서 이웃에 사는 생활보호 대상자 등 불우노인 3백여명이 떡이며 과일을 가득 차린 잔치상을 받고 흥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즐거워하는 노인들 사이를 돌며 이것저것 시중을 드는 김납순씨(41·도봉구 수유1동 58의25)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른다.
지난 49년 전남 함평에서 7남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난 김씨는 스무살이 되던 70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6·25때 부모를 잃고 칙척집을 전전하며 혼자 자라온 남편 박덕렬씨(50)와 결혼했다. 더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과의 신혼생활은 행복하기는 했으나 워낙 가진 것 없이 출발했기에 갈수록 생활고에 쪼들려야 했다.
어려운 살림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첫 딸을 낳은지 한달만에 채소행상으로 나서야 했다.
억척스럽게 벌어 알뜰하게 모은 끝에 4년만인 74년 어렵사리 30평짜리 집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다소 여유가 생겨 『이제부터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지』하던 터에 이듬해 어머니가,그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김씨는 어느날 『부모님들께 못다한 효도를 이웃 노인들께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나 행상으로 번 돈으로는 살림마저 빠듯해서 그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김씨는 그러다가 미장공으로 공사판에 나가는 남편의 도시락을 나르며 어깨넘어 틈틈히 미장기술을 배워 여성으로서는 힘에 벅찬 노동판에 뛰어 들었다.
김씨는 드디어 이같이 모은 돈으로 77년 어버이날을 맞아 이웃에서 쓸쓸히 사는 불우노인 50명을 집으로 초대,점심잔치상을 차려드렸다. 그리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께 효도하듯 정성을 다해 노인들을 돌봤다.
어버이날 한차례만으로는 너무 섭섭한 것 같아 연말잔치도 열었다.
잔치비용은 적을 때는 30만원 정도 들었으나 이야기를 듣고 모여드는 노인들의 수가 늘고 물가가 오르면서 요즈음은 3백만원 쯤으로 늘어났다.
김씨의 형편으로는 꽤나 벅찬 돈이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 80년부터는 이웃 소년소녀 가장 10명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뻗어 달마다 10여만원어치의 학용품을 선물하고 있다.
『10년쯤뒤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하나 짓는다는 꿈을 이룰 때까지 벽돌쌓기를 계속할 것』이라는게 김씨의 말이었다.<진경호기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오르간 반주를 따라 부르는 흥겨운 노래에 맞춰 너도나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간다.
하나같이 의지할 곳 없는 불우한 노인들이지만 이 날만은 남부럽지 않게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스스로도 어려운 형편이면서 때만되면 어김없이 이처럼 큰 잔치를 베풀어주는 사람은 놀랍게도 「미장공 아줌마」였다.
14일 낮12시 서울 도봉구 우이동 C음식점에서 이웃에 사는 생활보호 대상자 등 불우노인 3백여명이 떡이며 과일을 가득 차린 잔치상을 받고 흥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즐거워하는 노인들 사이를 돌며 이것저것 시중을 드는 김납순씨(41·도봉구 수유1동 58의25)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른다.
지난 49년 전남 함평에서 7남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난 김씨는 스무살이 되던 70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6·25때 부모를 잃고 칙척집을 전전하며 혼자 자라온 남편 박덕렬씨(50)와 결혼했다. 더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과의 신혼생활은 행복하기는 했으나 워낙 가진 것 없이 출발했기에 갈수록 생활고에 쪼들려야 했다.
어려운 살림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첫 딸을 낳은지 한달만에 채소행상으로 나서야 했다.
억척스럽게 벌어 알뜰하게 모은 끝에 4년만인 74년 어렵사리 30평짜리 집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다소 여유가 생겨 『이제부터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지』하던 터에 이듬해 어머니가,그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김씨는 어느날 『부모님들께 못다한 효도를 이웃 노인들께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나 행상으로 번 돈으로는 살림마저 빠듯해서 그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김씨는 그러다가 미장공으로 공사판에 나가는 남편의 도시락을 나르며 어깨넘어 틈틈히 미장기술을 배워 여성으로서는 힘에 벅찬 노동판에 뛰어 들었다.
김씨는 드디어 이같이 모은 돈으로 77년 어버이날을 맞아 이웃에서 쓸쓸히 사는 불우노인 50명을 집으로 초대,점심잔치상을 차려드렸다. 그리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께 효도하듯 정성을 다해 노인들을 돌봤다.
어버이날 한차례만으로는 너무 섭섭한 것 같아 연말잔치도 열었다.
잔치비용은 적을 때는 30만원 정도 들었으나 이야기를 듣고 모여드는 노인들의 수가 늘고 물가가 오르면서 요즈음은 3백만원 쯤으로 늘어났다.
김씨의 형편으로는 꽤나 벅찬 돈이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 80년부터는 이웃 소년소녀 가장 10명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뻗어 달마다 10여만원어치의 학용품을 선물하고 있다.
『10년쯤뒤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하나 짓는다는 꿈을 이룰 때까지 벽돌쌓기를 계속할 것』이라는게 김씨의 말이었다.<진경호기자>
1990-12-16 1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