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교류」제의를 듣고… 실향작가 이호철

「민족 대교류」제의를 듣고… 실향작가 이호철

이호철 기자 기자
입력 1990-07-21 00:00
수정 1990-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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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변하는데 북녘은 뭘하는지…/5일이나마 남북 함께 어울리면 얼마나 좋을까/나라도 「범민족대회」기꺼이 참가할 수 있으련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노태우대통령의 이번 5일간에 걸친 남북의 전면 개방제의는 얼마 전에 북쪽에서 내놓은 「판문점 북측지역 개방조치」에 대한 제의,다시 말해서 경쟁적인 대항조치로도 받아 들여진다.

사실 지나간 40여년에 걸친 남북 대결구조에 깊이 길들여져 있는 국민들로서는 이번의 제의도 그 실현성 보다는 정치선전적 행태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며칠전에 북측에서 저런 조치를 취하니까 그에 질세라 재빨리 그보다 한발 더 앞선 이런 제의를 내놓는구나 하고.

실제로 이번의 그 제의에 가장 흥분하고 감동을 해야 마땅할 이산가족중의 한사람인 필자마저 그 실현성에는 우선 의구심부터 생기는 것이다. 아니 의구심 이전에 체관인지 달관인지 모를 처음부터 담담한 심정이다. 당장은 성사가 될 리가 없다는 체념….

그야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야 여북 좋을 것인가. 북쪽에서 내려오고 싶은 사람들이 간단한 소정 절차를 밟아 마음대로 내려와서 닷새동안 남쪽의 어디건 누구건 가서 만나고 남쪽에서도 소정절차를 밟아 마음대로 올라가서 닷새동안 북쪽의 어디건 누구건 가서 만날 수 있다면야 여북이나 좋을 것인가. 온 7천만 민족 뿐아니라 산천초목들까지 흥분할 판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통일은 바로 코앞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 모처럼의 그 충격적이고도 고무적인 제의가 이렇듯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점이야말로 바로 오늘 우리 남북관계의 냉혹한 현주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번의 이 제의가 반드시 비현실적인 것이기만 한가. 지나온 40여년동안의 남북관계의 관행이나 발상법에 비추어본다면 그러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급변 추세에다 앵글을 맞추면서 작금의 동서독관계와 견주어 본다면 이번의 그 제의가 똑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니다.

동서독관계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주의권이 얼마만한 속도로 변화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종주국인 소련의 이번 제28차 당대회의 진행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다.

4년전의 제27차 당대회에서는 고르바초프서기장이 정치보고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운운하면서 『세계 사회주의는 강대한 국제체제이고… 인류의 3분의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다분히 도그마적 고정관념이 보이는 연설을 하고 있는데 이번 대회의 연설에서는 『소련은 2급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여 더 늦었더라면 엄청난 비극적 상황에 떨어질뻔 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4년동안의 엄청난 차이를 우리는 새삼 곰곰 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뿐인가. 대한민국의 생산성이 북쪽보다 10배나 된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 야코블레프 정치국원도 이번 당대회가 끝나고서의 한 인터뷰에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일로 모름지기 들어서자. 「이즘」(이데올로기)을 배제하고 국민을 먹여살리는 일에 전념하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권 전체가 재래의 도그마적 사고에서 실제적인 프로그머틱한 사고로 옮아 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제기된 북쪽의 「판문점 북측지역의 일방적 개방조치」와 남쪽의 이번 8ㆍ15를 기한 5일간의 「남북의 완전개방과 자유왕래」제의도 한번쯤 전진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설령 북쪽의 실제 저의가 9월로 예정된 남북총리회담 보다도 8월15일로 예정된 판문점 지역에서의 「범민족대회」라는 군중대회에 더 주안이 있고 그렇게 일방적인 대남 정치선전 쪽에 역점이 있다한들 뭐 어떻다는 말인가.

어떤 목적이 개재해있건 말건 그자체 「판문점 북측지역의 일방적 개방조치」는 그 개방조치만큼 전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전진」만큼 호의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이런 쪽으로도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북측에서 그다지도 열을 내어 「8ㆍ15범민족대회」를 기필코 이번 참에 성사시키고 싶어 하고 그런 목적에서 판문점북측지역의 일방적 개방조치도 모처럼 감행했다면 우리 측도 그쪽의 저의 같은 것은 까다롭게 따져들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그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거 참가하도록길을 터주고 그 대신에 그 참가한 사람들만이라도 희망자에 한해서 전원 닷새동안 북쪽 남쪽으로 마음대로 들어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건 일종의 절충안이기도 하지만 훨씬 현실적인 가능성 쪽으로 한발 다가선 안일 수가 있다.

이 경우 한가지 지켜져야 할 부대조건이 있다. 판문점 지역에서 열릴 「범민족대회」는 북쪽에서 계획해온대로 군중집회 형식이됐든 정치선전적 형식이 됐든 일체 간여를 않지만 그것을 마치고 각각 남북지역으로 들어가보는 경우에는 제각기 자연인 개인자격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북쪽에서 그다지도 노심초사,열을 올리고 있는 「8ㆍ15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켜주면서 이참에 이번 노대통령이 제의한 5일간의 「남북교류 왕래」까지 제한적으로나마 성사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제한적」인 길을 찾았을 뿐이지 이번 제의의 본지대로 이루어진다면야 더 바랄것이 없겠다.

그렇게 될 경우 다시 말해 이것을 북쪽에서 받아들일경우 필자부터도 「8ㆍ15 범민족대회」라는 것에 달려갈 용의가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소리들과 토론들과 판에 박힌 연설들,짝짝짝,와르르 터지는 박수소리 같은 것이야 못참을 것도 없다. 그걸 지그시 참아낸 다음 북쪽 산천으로 고향땅으로 고향의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면 그런 정도 못참아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0-07-21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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