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 서재필. 근세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분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위대한 선각자. 나라와 겨레를 위해 내일을 밝혔다는 데에 평가의 초점은 맞춰져야겠다. ◆1896년 4월7일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닙신문」만 해도 그렇다. 그 당시 한글로만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결단이며 개혁 의지였다. 이 날짜의 「논셜」은 그에 대해 이렇게 풀이한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띄어쓴즉 아무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현행 맞춤법으로 고쳐 옮겼음) ◆구한말을 전후한 한글 소설 등이 다닥다닥 붙여 쓴 것과는 다른 「독립신문」의 띄어쓰기. 이 「논셜」은 우리 국자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 각국에서는 사람들이 남녀 막론하고 본국 국문을 먼저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더라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묾이라…』 그러면서 한글 예찬일석을 편다. 선각자로서의 면모가 약여하다. ◆유럽ㆍ미국의 민주주의 이념을 도입하여 계몽에 힘썼던 선각자. 그는 본격적인 여권 신장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4월 21일자 「논셜」은 그에 대해 처음으로 신랄하고 통렬하게 지적한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인생은 조선 여편네이며 우리가 오늘날 이 불쌍한 여편네들을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면서 어째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야 하는가를 따진다. 5월12일자에서는 『첩을 얻는 사람이나 첩이 되는 계집은 지옥에 갈 것이며…』하고 저주하기까지. 여권론은 그때 횃불이 댕겨졌다. ◆「독닙신문」 창간일인 4월7일 신문의 날,서재필 선각자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독닙신문」을 펴낸 그해에 세운 독립문이 보이는 현저공원에. 전라도 보성땅 가천마을의 생가는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인지 어쩐지.
1990-04-0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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