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결단JP 중재YS 앞장 “결실”/「12ㆍ13」 청와대회담 때 「합당」 거의 결정/박철언황병태김용환 핫라인으로 활약/부작용 우려,조기개편으로 급선회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의 통합신당 결성은 「정치혁명」으로 불릴 만큼 모두에게 놀라움을 던졌으나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다 뿐이며 이런 기본구도에 대한 노대통령의 결심은 이미 지난해 12월초 유럽순방에서 귀국하면서 섰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대통령은 당시 귀국 전용기상에서 기자들과 만나 『초연한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으며 이때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 통합에 의한 안정세력구축의 결단을 내렸으리라는 관측이다. 즉 몇차례의 개별 혹은 영수회담을 통해 민주ㆍ공화당과 이념적 면에서 근접하는 부분이 많았던 반면 일련의 방북사건,5공청산 과정에서의 태도등을 볼 때 평민당과는 상당한 시각차를 느끼게 됐다고 여권 고위관계자들은 말한다.
노대통령의 「결단」 이후 5공청산 막바지협상 과정에서 「대통합→내각제 개헌」이 민정ㆍ민주·공화당간의 막후협상의 주된 의제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노대통령이 5공청산 이후 전개될 정국구도에 대한 결단에 따라 김종필 공화당총재가 충실한 「중재자」 역할을 했고 김영삼 민주당총재가 앞장서는 형식으로 3당통합의 하모니가 이뤄져 나갔다는 얘기다.
○88년 7월 신호탄 올라
○…정계개편 구상의 시발을 보다 근원적으로 따진다면 13대 대통령선거부터라고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당시 후보로서 선거전을 치르면서 생사를 건 대결,지역감정의 악화 등을 경험하고 『다음에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언급을 해왔다. 이에 덧붙여 4ㆍ26 총선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하자 국정운영의 불안을 타개한다는 명제가 커져 다각적 방안이 강구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을 감지한 박준병 당시 사무총장은 보수대연합으로의 정계개편 당위성을 조심스레 거론하기 시작했고 88년 7월 윤길중 당시 대표위원이 마닐라에서 내각제 개헌발언을 통해 「노대통령 재임시 정계개편」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나 5공청산ㆍ중간평가실시 등을둘러싼 논란 때문에 정계개편문제는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해 3월 중간평가 유보결정이 난 후 5∼6월쯤 노대통령이 측근들에게 개편방안을 적극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청와대에는 정계개편을 위한 특별연구팀이 구성되었으며 ▲중평유보에 있어 호의적 태도를 보인 평민당과의 연정▲공화당과의 연정이나 합당 ▲「헤쳐모여」식의 대연합으로 내각제 개헌달성 등 다양한 방안들이 검토대상에 올랐다.
○빈번한 골프회동 주효
○…이러한 여권의 구상이 여야간 본격절충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10일 노대통령과 공화당 김총재간의 단독회담부터이다. 김총재는 당시 보수대연합을 공식 제안했고 이에 노대통령이 긍정의 뜻을 표함으로써 양당간 연정 또는 합당문제에 대한 절충이 시작됐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이에 대한 결단을 미루는데다 8월말 이종찬 당시 민정당총장이 『공화당과 합치는 것은 도덕성문제를 야기한다』고 반발,양당 통합추진파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김종필총재는 이후 9월 한달동안 「칩거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 민주당과의 연합을 먼저 이룩한 뒤 민정당까지를 포함,대연합을 이뤄보자는 구상을 한 듯하다. 김영삼 민주당총재도 이에 호응,양인간 빈번한 골프회동이 이어졌으며 10ㆍ26사태 10주기 때 김영삼총재가 고 박정희대통령 묘소에 조화를 보내 유신을 「사면」하고부터 양당간 밀월관계가 한층 깊어졌다.
○귀국 기상서 결심한 듯
○…지난해 12월4일 노대통령이 유럽순방 귀국기상에서 대통합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박준규 당시 민정당대표위원이 이를 야당총재에게 통보함으로써 개편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박 당시 대표는 김영삼총재에게 이원조의원 문제에 대한 양보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보수대연합 혹은 중도통합에 의한 내각제 개헌 가능성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의원 문제에 대한 민주당의 양보로 12ㆍ15 청와대회담에서 5공청산에 대한 대타협이 이뤄진 후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 실무진간 통합 또는 연정에 대한 절충이 은밀히 시작됐다.
박철언정무1장관ㆍ황병태 민주총재특보ㆍ김용환 공화 정책위의장이 3당총재의 「분신」으로서 「하트라인」을 구성했다.
이들 3인의 개별접촉을 통해 통합신당의 윤곽이 잡혀나갔고 지난 12ㆍ13일 노대통령과 김영삼ㆍ김종필총재간의 개별 청와대회담 때 3당 합당이 거의 결정됐다는 것이다.
○반발ㆍ부작용 최소화
○…여권은 금년들어 홍성철비서실장ㆍ노재봉정치담당특보ㆍ최창윤정무수석 등 청와대 관계자들과 박철언정무1장관ㆍ박준병사무총장 등이 안가에서 잦은 당정회의를 갖고 개편문제를 논의,특히 박정무장관은 연일 심야작업을 계속해 그의 주도적 역할을 시사했으며 노특보도 김영삼총재를 몇차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주요 관심사는 민정ㆍ민주ㆍ공화가 합당하되 민주ㆍ공화가 먼저 한 뒤 민정이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한꺼번에 뭉칠 것인가등 절차와 시기문제였다고. 결국 반발과 부작용의 최소화를 위해 「조기개편」쪽으로 결론이 왔으며 호남대 비호남 대립,혹은 극우인사 포함 인상을 배제키 위해 보수대연합 대신 「중도연합」의 기치를 내걸기로 결정했다.<이목희기자>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의 통합신당 결성은 「정치혁명」으로 불릴 만큼 모두에게 놀라움을 던졌으나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다 뿐이며 이런 기본구도에 대한 노대통령의 결심은 이미 지난해 12월초 유럽순방에서 귀국하면서 섰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대통령은 당시 귀국 전용기상에서 기자들과 만나 『초연한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으며 이때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 통합에 의한 안정세력구축의 결단을 내렸으리라는 관측이다. 즉 몇차례의 개별 혹은 영수회담을 통해 민주ㆍ공화당과 이념적 면에서 근접하는 부분이 많았던 반면 일련의 방북사건,5공청산 과정에서의 태도등을 볼 때 평민당과는 상당한 시각차를 느끼게 됐다고 여권 고위관계자들은 말한다.
노대통령의 「결단」 이후 5공청산 막바지협상 과정에서 「대통합→내각제 개헌」이 민정ㆍ민주·공화당간의 막후협상의 주된 의제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노대통령이 5공청산 이후 전개될 정국구도에 대한 결단에 따라 김종필 공화당총재가 충실한 「중재자」 역할을 했고 김영삼 민주당총재가 앞장서는 형식으로 3당통합의 하모니가 이뤄져 나갔다는 얘기다.
○88년 7월 신호탄 올라
○…정계개편 구상의 시발을 보다 근원적으로 따진다면 13대 대통령선거부터라고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은 당시 후보로서 선거전을 치르면서 생사를 건 대결,지역감정의 악화 등을 경험하고 『다음에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언급을 해왔다. 이에 덧붙여 4ㆍ26 총선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하자 국정운영의 불안을 타개한다는 명제가 커져 다각적 방안이 강구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을 감지한 박준병 당시 사무총장은 보수대연합으로의 정계개편 당위성을 조심스레 거론하기 시작했고 88년 7월 윤길중 당시 대표위원이 마닐라에서 내각제 개헌발언을 통해 「노대통령 재임시 정계개편」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나 5공청산ㆍ중간평가실시 등을둘러싼 논란 때문에 정계개편문제는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해 3월 중간평가 유보결정이 난 후 5∼6월쯤 노대통령이 측근들에게 개편방안을 적극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청와대에는 정계개편을 위한 특별연구팀이 구성되었으며 ▲중평유보에 있어 호의적 태도를 보인 평민당과의 연정▲공화당과의 연정이나 합당 ▲「헤쳐모여」식의 대연합으로 내각제 개헌달성 등 다양한 방안들이 검토대상에 올랐다.
○빈번한 골프회동 주효
○…이러한 여권의 구상이 여야간 본격절충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10일 노대통령과 공화당 김총재간의 단독회담부터이다. 김총재는 당시 보수대연합을 공식 제안했고 이에 노대통령이 긍정의 뜻을 표함으로써 양당간 연정 또는 합당문제에 대한 절충이 시작됐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이에 대한 결단을 미루는데다 8월말 이종찬 당시 민정당총장이 『공화당과 합치는 것은 도덕성문제를 야기한다』고 반발,양당 통합추진파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김종필총재는 이후 9월 한달동안 「칩거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 민주당과의 연합을 먼저 이룩한 뒤 민정당까지를 포함,대연합을 이뤄보자는 구상을 한 듯하다. 김영삼 민주당총재도 이에 호응,양인간 빈번한 골프회동이 이어졌으며 10ㆍ26사태 10주기 때 김영삼총재가 고 박정희대통령 묘소에 조화를 보내 유신을 「사면」하고부터 양당간 밀월관계가 한층 깊어졌다.
○귀국 기상서 결심한 듯
○…지난해 12월4일 노대통령이 유럽순방 귀국기상에서 대통합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박준규 당시 민정당대표위원이 이를 야당총재에게 통보함으로써 개편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박 당시 대표는 김영삼총재에게 이원조의원 문제에 대한 양보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보수대연합 혹은 중도통합에 의한 내각제 개헌 가능성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의원 문제에 대한 민주당의 양보로 12ㆍ15 청와대회담에서 5공청산에 대한 대타협이 이뤄진 후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 실무진간 통합 또는 연정에 대한 절충이 은밀히 시작됐다.
박철언정무1장관ㆍ황병태 민주총재특보ㆍ김용환 공화 정책위의장이 3당총재의 「분신」으로서 「하트라인」을 구성했다.
이들 3인의 개별접촉을 통해 통합신당의 윤곽이 잡혀나갔고 지난 12ㆍ13일 노대통령과 김영삼ㆍ김종필총재간의 개별 청와대회담 때 3당 합당이 거의 결정됐다는 것이다.
○반발ㆍ부작용 최소화
○…여권은 금년들어 홍성철비서실장ㆍ노재봉정치담당특보ㆍ최창윤정무수석 등 청와대 관계자들과 박철언정무1장관ㆍ박준병사무총장 등이 안가에서 잦은 당정회의를 갖고 개편문제를 논의,특히 박정무장관은 연일 심야작업을 계속해 그의 주도적 역할을 시사했으며 노특보도 김영삼총재를 몇차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주요 관심사는 민정ㆍ민주ㆍ공화가 합당하되 민주ㆍ공화가 먼저 한 뒤 민정이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한꺼번에 뭉칠 것인가등 절차와 시기문제였다고. 결국 반발과 부작용의 최소화를 위해 「조기개편」쪽으로 결론이 왔으며 호남대 비호남 대립,혹은 극우인사 포함 인상을 배제키 위해 보수대연합 대신 「중도연합」의 기치를 내걸기로 결정했다.<이목희기자>
1990-01-2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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