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한 벌 입고 나왔는데”…구룡마을 덮친 화마, 한겨울 이재민들의 한숨[취중생]

“옷 한 벌 입고 나왔는데”…구룡마을 덮친 화마, 한겨울 이재민들의 한숨[취중생]

손지연 기자
손지연 기자
입력 2026-01-17 09:07
수정 2026-01-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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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도 세대도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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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화재 현장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화재 현장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옷 한 번만 입고 나왔으니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면….”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집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주민 하춘(74)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6지구,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잿더미만 남았습니다. 6지구에서 40여 년을 살았다는 하씨는 텅 빈터가 된 마을을 한참 바라보다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세탁기며 전자레인지, 40년의 세간살이를 한순간의 화마가 집어삼켰습니다. 하씨는 “이웃 한 사람은 아들 결혼시킨다고 가진 패물을 전부 집에 놔뒀다”며 “몸만 빠져나왔는데 패물이 남아 있겠느냐”고 혀를 찼습니다.

서울 강남에 남은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에 지난 16일 큰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180여명의 주민들이 추운 겨울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습니다.

17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번 화재는 전날 오전 5시쯤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해 인접한 6지구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빈집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 당국은 4·5·6지구 주민 258명을 대피시켰습니다.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자 소방은 한때 대응 2단계를 발령하고 인근 소방서 인력을 총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화재가 초진된 지 약 3시간이 흐른 오후 3시쯤. 기자가 찾은 구룡마을은 여전히 마을 입구부터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한 차례 사투를 벌인 소방대원들은 길에 앉아 물을 마시며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남은 불씨를 잡기 위해 곳곳을 오가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불에 탄 합판과 비닐 잔해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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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관들이 잔불을 진압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관들이 잔불을 진압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180여 명에 달하는 이재민들이 마을에 남았습니다. 구룡마을은 떡솜과 비닐, 합판 등 불에 취약한 자재로 지어진 판잣집이 밀집해 있고, 골목이 좁아 소방차 진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은 탓입니다.

동네 마을회관에 내려가 보니 갈 곳을 잃은 주민들이 모여 ‘임시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당장 닥칠 겨울 추위가 걱정입니다. “다음 주에 영하 10도, 13도까지 내려간다는데 텐트 치고 버틸 수 있겠나”, “사우나, 모텔이라도 잘 곳이 필요하다”는 근심이 곳곳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강남구청은 이재민들을 위해 인근 호텔과 사우나를 임시 숙소로 제공했지만, 지원 기간은 열흘 남짓에 그칩니다.

이재민들뿐 아니라 피해를 보지 않은 인접 지구 주민들도 겨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화재로 마을 전체의 전기와 수도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2지구에 산다는 80대 주민 A씨는 “전기가 나가 보일러도 안 된다”며 “휴대전화라도 충전하려고 잠시 대피소로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A씨는 “한전에서도 언제 전기가 복구될지 모른다고 하니 속이 탄다”며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컨테이너로 지어진 마을회관에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집을 잃은 것도 서러운데, 주민들 사이에는 ‘살 곳을 아예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감돌고 있었습니다. 현재 구룡마을은 내년 상반기 재개발 착공을 앞두고 있지만, 수십년간 이곳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은 ‘최소한의 살 곳을 보장해달라’며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22세부터 구룡마을에 살았다는 이모(59)씨는 “서울시가 준다는 임대아파트는 여기 노인분들이 매달 월세도 내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토로했습니다. 37년 동안 살았던 집을 잃은 이씨는 직장 근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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