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근처에 와인 바가 하나 있다. 이 가게는 골목을 끼고 한참 돌아서 그 골목 끝에 위치해 있다. 간판도 멋있게 만든 것은 좋은 데,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글바글하다. 와인이 보편화됐기도 하지만, 가게는 골목 안이어서 오히려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친절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이 가게를 보면서 평소 음식점이나 가게들이 큰길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뜨리게 됐다.
이미지 확대
닫기이미지 확대 보기
이런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 등과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횡성에 이르러 점심 때가 됐다. 최 선생님은 이름난 미식가인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손을 잡아끌고 허름한 막국수집으로 안내했다. 시골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막국수는 별미였다. 간판이 제대로 달려 있지도 않은 이 집을 서울의 유명한 문인이 알 정도로 소문이 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요란하게 간판을 만들어 손님을 유혹하는 건 모두 ‘한탕’식 접근법이다. 뜨네기 손님을 끌어 한번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하고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역이나 광장 주변의 식당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말하자면 뜨네기식 영업이고 뜨네기 가게들이다.
가만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매번 식당이나 가게의 주인이 바뀌고 업종이 바뀐다. 내부 시설을 매번 뜯어고치느라 바쁘다. 그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얘기다. 우리도 외국처럼 10년 되고,100년 된 가게들이 줄줄이 생겨나면 얼마나 좋을까.
외국의 여러 도시들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도시와 골목들이 참 부러워진다. 골목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간판에 있다. 그래서 예쁜 간판들을 찍다가 시간을 다 흘려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미국 뉴멕시코의 산타페, 캘리포니아의 맨도시노나 소노마 등에서 그랬다. 이런 도시일수록 관광객도 많고 그만큼 예쁜 간판과 골목으로 먹고 살 수 있다. 좋고 예쁜 가게들이 즐비한 문화예술의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관광객이 많고 수입이 높아지며, 선진 도시가 된다는 것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연히 한번 들러본 식당이나 가게에서 값싸고 물건 좋고 친절하면 그 다음 반드시 찾기 마련이다.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도 소개해 그 집은 단골 손님들로 가득 차고,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루는 법이다. 간판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의 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
간판개선운동은 단지 아름다운 미관을 만드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가게 주인들이 손님에게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진실된 마음, 훌륭한 마음 갖기 운동과 다를 것이 없다. 간판개선운동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희망제작소는 출범 당시부터 간판문화연구소를 설립한 뒤, 다양한 캠페인과 컨설팅을 벌여왔다.
간판개선은 단순히 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간판을 만드는 제작업자, 그것을 의뢰해 자신의 가게 앞에 내거는 가게 주인들, 그것을 보고 칭찬할 줄 아는 시민과 소비자들의 인식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간판개선은 종합행정이요, 민·관·기업의 거버넌스 체제로 이뤄져야 효과를 더할 수 있다. 더구나 하루 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노력은 시작됐고, 작지만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바람을 타고 삽시간 전국으로 번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특징이다. 간판개선과 도시개혁의 좋은 바람도 힘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08-07-21 1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