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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재단-부자의 상상력을 기부하라] <2부>선진 공익재단 현장을 가다 (6)미국 부자와 아프리카 농부의 꿈

[공익재단-부자의 상상력을 기부하라] <2부>선진 공익재단 현장을 가다 (6)미국 부자와 아프리카 농부의 꿈

입력 2012-08-01 00:00
업데이트 2012-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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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밥을 줬다면 우리는 다시 굶주렸겠죠”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동북쪽으로 73㎞ 떨어진 무랑가 지역의 사바사바 마을에서 만난 중년 여성 사비나(64)는 이웃 주민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성공한 농부다. 고작해야 소 몇 마리 키우거나 소규모 농사를 짓는 영세 농가가 대부분인 이 마을에서 사비나는 소의 이력추적시스템을 도입한 과학적 축산을 하고, 7000㎡(약 2100평) 규모의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다는 사비나는 독학으로 글을 깨칠 정도로 활달한 성격과 진취적 성향이 두드러진 여성이었다. 하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다른 소농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개념은 희박했다. 그저 열심히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었을 뿐 수확물을 어떻게 팔아야 제값을 받을 수 있을지, 또 농가소득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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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상인 레나 무상기가 전통 농작물 마나구를 가득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채소 상인 레나 무상기가 전통 농작물 마나구를 가득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그녀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아프리카녹색혁명동맹’(AGRA)이 케냐 최대 은행인 ‘에쿼티 뱅크’와 손잡고 개설한 경제교실 프로그램이었다.

사비나는 지난해 12주 과정을 수료하고, 인증서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에쿼티 뱅크에서 농가를 위한 저리 자금을 대출받아 물 펌프를 설치하고, 외양간을 증축하는 등 농사에 비즈니스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지난해 연 소득은 4만 실링(약 480달러, 55만원)으로 늘었다. 케냐의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467달러이고, 케냐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농업 소득은 국내총생산(GDP)의 30%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고소득이다. 사비나는 “착실하게 돈을 모아 나이로비에 건물을 짓는 게 목표”라며 활짝 웃었다.

아프리카 농부 사비나의 꿈은 대서양 건너편 미국 부자와 연결돼 있다. 사비나가 도움을 받은 AGRA는 2006년 록펠러재단과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아프리카 농가들의 빈곤 타파를 목적으로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 기구다. 나이로비에 본부를 둔 AGRA는 케냐를 비롯해 아프리카 각국의 농가를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빌 게이츠(왼쪽 세번째)가 2009년 국제축산연구소(ILRI)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찍은 사진.
빌 게이츠(왼쪽 세번째)가 2009년 국제축산연구소(ILRI)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찍은 사진.
AGRA는 사바사바 마을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AGRA의 교육 지원으로 2008년 마을 협동조합이 설립됐다. 기껏 농사를 지어도 중간도매상의 농간에 헐값으로 농작물을 넘겨야 했던 농가들이 힘을 합쳐 생산과 가공, 판매를 주도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증대됐고, 농산물의 부가가치도 높아졌다.

알렉스 가마우(55)조합장은 “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바나나 1㎏에 40실링을 받았는데 이제는 70실링을 받는다.”며 흐뭇해했다.

슈퍼 부자의 기부가 아프리카의 농가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는 나이로비에서 동쪽으로 180㎞ 거리에 위치한 키투이 지역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며 이 지역은 케냐의 다른 농촌 마을들처럼 전통 농작물 대신 값싼 외국 농작물 종자를 수입해 농사를 지어 왔다.

마나구(가지의 일종) 같은 전통 농작물은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고, 외국 농작물 비중은 80%를 넘었다. 그러다 2008년부터 생물다양성 연구를 위한 비영리 기구인 ‘바이오버시티 인터내셔널’(BI)의 지역 특산 농작물 지원 프로그램에 힘입어 10여종의 전통 채소를 다시 재배하기 시작했다.

1주일에 두 차례 열리는 마을 장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채소는 단연 마나구였다. 채소 판매상 레나 무상기(35)는 “마나구는 각종 영양소가 풍부해 갖다 놓기 무섭게 팔린다.”고 말했다. 이때 한 청년이 장터를 돌며 상인들에게 뭔가를 팔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취재에 동행한 BI의 일본인 연구원 모리모토 야스유키 박사는 “BI가 구입한 마나구 씨앗을 싼값에 판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료로 나눠 주는 것보다 소액의 돈을 받고 파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탈리아에 본부가 있고, 나이로비 등에 지부를 둔 BI는 농업생물자원의 다양성을 확보해 개발도상국의 빈곤과 기아퇴치를 돕는 연구·교육 기관이다. 국제농업연구협의그룹(CGIAR)에 속해 있는 BI는 재정의 대부분을 각국 정부와 CGIAR로부터 지원받지만 일부는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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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는 사바사바 마을의 여성 농민 사비나가 남편과 바나나 농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는 사바사바 마을의 여성 농민 사비나가 남편과 바나나 농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모리모토 박사는 “케냐 빈곤 계층, 특히 여성과 아동의 영양 확보와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연구에 게이츠 재단이 1억 달러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게이츠 재단이 아프리카 농가를 위해 기부한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제축산연구소(ILRI)를 통해 아프리카 농업 혁명을 이끌 과학자들을 후원하는 기금 조성에 동참하고 있다. ILRI의 회의실에는 2009년 빌 게이츠가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기념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ILRI 파견연구원인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의 조창연 박사는 “아프리카 각국 과학자들이 연구소에서 3~6개월간 연구하고 귀국해 현장에 새로운 지식을 접목한 뒤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연구를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부자들의 자선행위가 단순한 기부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한 투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본 케냐의 농촌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부자들의 기부는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농민 대다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바사바 마을의 농부도, 키투이의 채소 상인도 미국인 갑부 빌 게이츠가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게이츠 재단을 비롯한 민간 공익재단들이 농가에 돈이나 물품을 직접 지원하는 대신 전문가 조직을 통해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간접 지원 방식을 철저히 고수한 까닭이다.

키투이에서 만난 마을 지도자 피터 물라(43)는 “빌 게이츠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줬다면 금방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며 “효과가 늦게 나타나더라도 간접 지원이 낫다.”고 말했다. 당장 눈앞의 성과에 연연하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부자들의 기부 방식은 아프리카 농부들의 삶에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글 사진 나이로비(케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012-08-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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