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의 달콤함 뒤에 숨은 부작용이 어디 비만이나 충치뿐이랴. 상업주의의 소산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 선물 열풍’은 여전히 위세가 드높다. 하지만 초콜릿 가게 앞 장사진의 길이만큼이나 울적함에 빠져드는 사람도 많다. 초콜릿 못 받는 남성, 초콜릿 줄 곳 없는 여성이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후 남녀 어른들이 앓는 ‘후유증’을 들어봤다.
●후유증1. 의리 초콜릿에 오버하는 남자들
“의리(義理) 초콜릿이 아닙니다. 분명히 애정이 담긴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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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인 14일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이주원(가명·32) 대리는 출근 후 동료 여직원이 건넨 초콜릿 때문에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었다. 아침에 이 대리의 책상 위에는 ‘해피 밸런타인! 맛있게 드세요.’란 메모와 함께 초콜릿 한 조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그녀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옆자리 조 대리의 책상에도 비슷한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보낸사람은 같았다. 아뿔싸, 이씨가 받은 것은 이른바 ‘의리 초콜릿’이었다. ‘의리 초콜릿’이란 여성이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직장동료 등 주변 남자들 모두에게 선물하는 초콜릿을 말한다. 상사에게 건네면 ‘아부 초콜릿’이란 이름이 붙는다. 그냥 인사 치레로 무슨 감정이나 애정이 담긴 게 아니다.
이 대리는 “그래도 내가 받은 게 다른 사람이 받은 것보다는 비싸고 크기도 컸다. 화이트데이(3월14일)에 멋진 사탕부케를 선물해 사랑을 확인해 보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위에서는 사랑의 성사 가능성을 놓고 내기까지 걸었다. 하지만 이 대리가 괜히 ‘오버’했다가 망신당할 거라는 쪽이 10명 가운데 8명으로 압도적이다. 호의를 애정으로 해석하는 남자들의 착각은 주위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무심코 돌린 의리 초콜릿에 괜한 오해를 샀다는 정은경(29)씨도 비슷한 경우. 정씨는 올해 직장에서는 초콜릿을 돌리지 않았다.
“관심 있는 남자 동료에게 의리 초콜릿을 빙자해 살짝 애정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성의 표시일 뿐이죠. 가끔 무작정 ‘들이대는’ 남자들을 보면 난감해요.”
●후유증2.“우리도 초콜릿 먹을 줄 안다…유부남이나 아빠는 입이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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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밸런타인데이인데 당신은 뭐 없어?”“그냥 식사나 하시죠. 당신 배 안 보여? 초콜릿 먹으면 살쪄.”
결혼 3년차인 회사원 윤모(35)씨는 14일 아침 평소보다 세게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결혼기념일과 크리스마스에 밸런타인데이까지. 기념일마다 아내는 까맣게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요 근래 3차례 연속이다.
아이가 생긴 이후 더욱 빠듯해진 살림에 특별한 선물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 흔한 초콜릿 하나에도 이렇게 인색할 줄이야. 윤씨는 “연애할 땐 귀찮을 정도로 기념일을 챙기던 아내가 이제 아줌마로 변해 버린 것 같다. 식당만 가도 계산할 때 사탕 대신 초콜릿을 주는 날인데 이건 성의부족인지 사랑이 식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학원을 운영하는 조광영(47)씨도 중학교 1학년인 딸에게 못내 서운하다. 전날 저녁 딸이 초콜릿 꾸러미와 포장지를 감춰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본 조씨는 내심 아침에 있을 ‘선물 증정식’을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딸은 일어나자마자 포장된 초콜릿 박스를 한아름 안고 휑하니 학교로 떠났다.
딸의 방에는 늦은 시간까지 선물포장을 한 듯 포장지와 비닐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부인은 “같은 반에 남자 친구가 생겼대요.”라며 웃었지만 조씨는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결혼 15년차에 부인이 챙겨 주리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지만 딸도 이렇게 빨리 아빠를 배신할 줄은 몰랐네요.”
●후유증3.“넌 못 받아 외롭지? 난 못 줘서 더 외롭다”
말할 것 없이 짝 없는 남녀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밸런타인데이에 정점을 찍는다. 밸런타인데이는 어찌어찌 넘긴다 해도 한 달 후면 또 화이트데이다. 솔로인 여성들은 못 받은 남자보다 못 주는 여자의 스트레스가 더하다고 입을 모은다.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박모(29·여)씨는 “별 일 없다는 듯 태연해 보여도 사실 애인 없는 여자들이 이 시기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결코 만만치 않다.”면서 “아무래도 외로운 기념일 보내며 받는 스트레스는 여성이 훨씬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결혼정보업체 회원 가입 추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업계에선 밸런타인데이 직후는 회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대목으로 꼽는다.
지난해 결혼정보업체 듀오의 경우 밸런타인데이 뒤 일주일(2월14∼20일)간 가입회원이 직전 일주일(7∼13일)에 비해 무려 21%나 늘었다. 이 기간에 새로 가입한 여성 회원은 30%나 증가한 반면 남성 회원은 12% 정도가 늘었다.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간다는 화이트데이 직후(3월14∼20일)에도 이 업체의 남녀 회원은 13%나 증가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화이트데이 직후 남자 신규회원은 전주보다 8% 정도 감소한 반면 여성회원은 30%나 증가했다는 사실.
듀오 오미경 대리(30)는 “평소 남녀 가입률이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성이 남성에 비해 기념일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방심하고 있다가 쓸쓸한 기념일을 보낸 분들이 이 기간에 대거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2006-02-1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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