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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퍼스트 레이디, 새 옷만 입었나 [클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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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ㅣ 수정 : 2022-04-04 09:22 클로저 섹션 목록 확대 축소 인쇄

주요 행사서 여성의 권위 드러낸 패션 역사
엄격한 유교 사회서도 패션 유행 있던 조선

조선 의복으로 보는 퍼스트 레이디의 의상
상의원 장인 손에서 만든 옷들, 어디로 갔을까

왕실의 퍼스트 레이디와 주변인들, 어떤 옷 입었나
600여명의 장인, 궁 내 직원으로 일하며 새 옷 공급
가체·노리개·비녀…장신구 적은 시대의 표현 수단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왼쪽·청와대 제공),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불거진 김정숙 여사 옷값 관련 게시물(오른쪽).

▲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왼쪽·청와대 제공),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불거진 김정숙 여사 옷값 관련 게시물(오른쪽).

패션은 취향을 드러내며 시대를 담습니다. 근래 퍼스트 레이디의 옷에 관심이 크죠. 과거 조선에서의 옷은 엄격하게 신분별로 나뉘었고 국가 행사 때마다 입도록 여겨지는 옷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대신 금박·자수·염색으로 왕실 지체 높은 이들의 옷은 화려했죠. 

서민들은 이들의 스타일을 선망하며 혼인 등 특별한 날 입었습니다. 오늘날 유명인의 결혼식 드레스가 무엇인지, 퍼스트 레이디가 착용한 옷의 브랜드는 어디인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싶어하는 모습과 닮아 있네요. 패션은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조상들은 알고 있었나봅니다.
왕비만 입을 수 있던 적의(왼쪽), 활옷(오른쪽). 조선시대 공주·옹주의 대례복으로 서민은 혼인식날 입을 수 있었다. 원삼과 형태는 비슷하나 화목한 가정을 의미하는 봉황,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모란을 넣는 등 자수가 다르다. 강민혜 기자

▲ 왕비만 입을 수 있던 적의(왼쪽), 활옷(오른쪽). 조선시대 공주·옹주의 대례복으로 서민은 혼인식날 입을 수 있었다. 원삼과 형태는 비슷하나 화목한 가정을 의미하는 봉황,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모란을 넣는 등 자수가 다르다. 강민혜 기자

● 600여명 근무하던 왕실 의복 제작 공간

“사신이 사가는 모물 외에 남아 있는 초 805장과 호피 635장과 이피 758장과 산달피 904장을 모두 상의원으로 수송하였사온데…” (세종실록, 세종 7년)

상의원은 어딜까요. 모피들을 상의원으로 옮겼다는 걸 보면요. 옷을 제작하던 곳이겠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의원은 착용하시는 의복 등을 두시는 곳인 만큼, 더욱 저 흉하고 더러운 물건들을 함께 둘 곳이 아니옵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 “상의원(尙衣院) 관원이 연복(練服)을 바치면…(중략)…” (단종실록, 단종 1년)

상의원은 왕이 입는 옷을 뒀던 장소이기도 한데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고려시대 왕의 의복을 지었던 장복서를 모델로 만든 관아예요.

옷을 짓는 일 외에도 재물·보물 등 왕실 수요 귀중품, 일용품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했죠. 때론 왕의 명에 따라 신하의 옷을 짓거나 보물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기록에는 왕이 필요시 상의원에 옷을 지어올릴 것을 명한 일이 다수 드러나 있죠.

“상의원(尙衣院)의 공장(工匠) 정원수는 401명이온데 66명을 더하여 정원으로 하기를 청하옵니다.” (세종실록, 세종 21년)

세종대왕 시절 467명이던 상의원 장인 수는 이후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597명까지 늘어납니다. 이중 제직 담당 장인의 수는 220명으로 가장 많았죠.

복식 제작은 74명으로 두 번째로 많습니다. 세종 1년 “상의원에 쓸데없는 인원 충원을 금하라”는 기록이 있었으나 600명에 육박할 만큼 장인이 늘어난 걸 보면요. 궁궐 사람들의 옷 제작에 꼭 필요했던 인원이 많았던 걸로 보입니다.
비녀와 그를 포장한 보자기. 금박 장식이 눈에 띈다. 이러한 금박 무늬는 장인이 금을 붙이고 말려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야 했다. 강민혜 기자

▲ 비녀와 그를 포장한 보자기. 금박 장식이 눈에 띈다. 이러한 금박 무늬는 장인이 금을 붙이고 말려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야 했다. 강민혜 기자

● 가체·의복…제약 피해 취향 내세울 수단 적어

조선 시대는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죠. 이 때문에 여성들이 국가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체, 노리개, 비녀를 통해서였죠. 남성에게 관모가 있다면 여성에겐 가체가 있었습니다. 그 화려함, 크기 등으로 신분을 알 수 있었죠.

“부녀자들의 가체를 금하고 속칭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가체의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곧 몽고의 제도이다…(중략)…부인이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백 금을 썼다. 그리고 갈수록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으므로 임금이 금지시킨 것이다.” (영조실록, 영조 32년)

영조에 의해 가체가 금지된 후엔 첩지 등을 통해 신분을 구별하는 것에 그치는 등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적었습니다. 그러나 첩지도 화려하게 꾸며내 유교 규율 속에서도 멋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죠.

● 국가 행사, 명확히 신분 드러내야


내명부 수장 왕비는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공식 행사에는 적의를 입고 참여했으며 이 때 왕비만 이 옷을 입을 수 있었죠. 평소 왕실 여성들은 당의·저고리·치마를 입는데요. 왕비도 적의를 입을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평상복이지만 대홍색·홍색 원삼·자적색 치마를 입을 수 있는 건 대개 왕비만 가능한 구분이 있습니다. 후궁은 녹색·자적색 원삼을 입습니다. 궁녀들은 남치마를 입었죠.

이들이 입은 모두 상의원에서 지은 것이에요.

“상의원(尙衣院)도 대궐 안에서 시종하는 신하이니…(중략)…” (성종실록, 성종 11년)

상의원에 쓰이는 물건 재료를 대는 장인들은 관아에 소속된 이들이므로 출근일수를 채우게 하거나 6개월씩 교대 근무를 시키는 등 관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상의원도 대궐 안에 있는 신하로 처우받았죠.
용머리 비녀(왼쪽), 영친왕비 당의와 남색스란치마(오른쪽). 당의는 궁중 평상복이다. 스란치마는 금박·금작으로 장식한 단을 넣은 치마다. 평민은 이렇게 장식한 옷을 옷을 입을 수 없었다. 강민혜 기자

▲ 용머리 비녀(왼쪽), 영친왕비 당의와 남색스란치마(오른쪽). 당의는 궁중 평상복이다. 스란치마는 금박·금작으로 장식한 단을 넣은 치마다. 평민은 이렇게 장식한 옷을 옷을 입을 수 없었다. 강민혜 기자

● 왕실 행사 의복 규정까지

가체 금지령을 내렸던 영조는 낭비를 금한다며 상의원 업무에 드는 비용에 관해 규칙을 정해 ‘상방정례’를 펴내도록 했습니다. 왕실 행사 등에 필요한 의복을 정리한 책이에요.

이에 따르면 제철의복을 준비한 기록이 있는데요. 저고리, 치마를 기본으로 한다고 앞서 보았죠. 여기에 시기별로 다른 옷을 입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진상받은 재료로 옷을 지었죠.

담비털·왕비의 새 대홍색 옷·홑치마·겹치마·솜치마 등 다양한 옷을 진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기록으로 몇 벌이었는가를 확인하긴 어려우나 시기별로 진상한 옷감에 따라 새 옷을 지어 올렸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겠네요.

상의원에서 왕실 행사의 격에 맞는 옷을 지어 올리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지금의 디자인하우스들이 전체적인 시즌별 주제를 정해 논의, 결제해 제작하듯 상의원에서도 당자를 만들어 위에 올려 허락을 받으면 복식을 준비했죠.

행사에 따라 왕비는 적의에 패물을 갖추기도 하고 적의만 입기도 했습니다.
조선 의복 양상은 자급자족의 행태가 보이나 왕실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강민혜 기자

▲ 조선 의복 양상은 자급자족의 행태가 보이나 왕실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강민혜 기자

● 내명부 1인자의 옷, 관심의 대상
가체, 거듭 금지했지만…새 유행 생겨


왕비가 상의원으로부터 진상받아 입었던 옷들의 스타일은요. 궁을 오갈 수 있던 궁녀·기생을 통해 외부로도 번졌습니다. 서민들은 혼인 등 특별한 날엔 이런 옷을 입을 수 있었죠.

오늘날 패션의 트렌드를 유명인들이 이끌어가듯 조선 내명부 1인자의 옷이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적의는 입을 수 없으니 원삼의 형태를 따라 입었죠. 원삼도 큰 옷이니 형태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의상 외 가체도 조선 여인의 주 패션이었다고 했죠. 영조가 금지했지만요. 영조 자신도 정순왕후와의 혼인 때 가체를 씌우는 제대로 금지할 순 없었습니다. 엄격하게 취향을 숨기라고 요구되던 시대, 가체만이 유일한 장신구처럼 역할했기 때문이죠.

정조는 이에 ‘가체신금사목’ 즉 가체금지령을 정해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가 “가체(加髢)를 금한 것은 또한 요즘에 어떠한가?” (정조실록, 정조 18년) 하고 묻자 좌의정 김이소는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중략)…정해진 규격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제안합니다.

이에 정조는 “규중에 있는 부녀자의 뒷머리가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아내서 금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굳이 계속해서 거듭 금할 것 없이 지금 여기…(중략)…신하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정해진 제도를 어기지 않게 다스리고…(중략)…본받게 될 것이다” 하고 원론적으로 답하는데 그쳤네요.
청색을 사용해 황후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던 적의다. 12등분으로 돼 있으며 황후(대한제국 시기 이후 왕비를 지칭하는 말)만 입을 수 있다. 대례복으로 주로 혼인날 입었다. 또한 화려한 장식의 대수머리를 꼭 해야 했다. 강민혜 기자

▲ 청색을 사용해 황후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던 적의다. 12등분으로 돼 있으며 황후(대한제국 시기 이후 왕비를 지칭하는 말)만 입을 수 있다. 대례복으로 주로 혼인날 입었다. 또한 화려한 장식의 대수머리를 꼭 해야 했다.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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