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의상 디자이너 한정임
12년 동안 50여개 뮤지컬 옷 제작日 브랜드 디자이너로 10년 일하다
사람에게 감동 주는 뮤지컬에 빠져
작품 속 시대 배경까지 꼼꼼히 공부
“의상은 혼 담은 작품… 가치 못 매겨”

▲ 한정임 디자이너
12년 동안 의상을 제작한 뮤지컬만 50여개, 재연을 비롯해 여러 차례 선보인 공연들을 모두 합치면 무대에 올라간 의상이 수천 벌에 이른다. ‘모차르트!’, ‘엘리자벳’, ‘레베카’, ‘프랑켄슈타인’, ‘마타하리’, ‘베르테르’, ‘몬테 크리스토’ 등 많은 캐릭터가 한정임 디자이너의 바늘 한 땀, 패턴 한 조각에서 살아났다.
서울 성수동 의상실에서 최근 만난 한씨는 일본의 한 어패럴 브랜드의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다고 밝혔다. 입사한 지 3년도 안 돼 수석 디자이너를 꿰찰 만큼 10년간 옷에 미쳐 살았다. 수백억대 연매출 관리에 판매·영업에 인사까지 책임지다 보니 점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2006년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단기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 뮤지컬을 만났다. “‘오페라의 유령’을 보며 관객들이 울고 웃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옷으로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은 한씨는 2008년 대학로 뮤지컬 ‘실연남녀’로 무대 의상을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속옷부터 블라우스, 드레스, 재킷, 신발까지 배우 몸에 걸치는 모든 의상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실크와 가죽, 레이스 등 재질과 색깔, 주름과 패턴에 ‘희로애락’을 그려냈다.
한씨는 “내가 먼저 작품 속 캐릭터가 돼 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레베카’ 땐 덴버스 부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화원에서 핏빛 도는 흑란을 사와 책상 옆에 두고 일을 하고, 꽉 닫힌 단추들로 배신당한 덴버스의 절절함을 표현했다. ‘몬테 크리스토’는 인도에서 구한 독특한 원단으로 옷을 만들었다. ‘마타하리’ 소품은 발리에서 수집했다. 베트남 전쟁을 그린 ‘천국의 눈물’은 직접 만난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인사동, 동묘를 뒤져 전쟁의 흔적들을 찾아냈다. ‘엘리자벳’에선 아들을 잃은 엘리자베스의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도록, 배우가 질질 끌고 다닐 만큼 무거운 드레스를 만들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옥주현이 “옷이 무거우니 노래도 힘들게 나왔다. 감정을 더 살릴 수 있다”며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글 사진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