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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옥새4] 톤 낮은 영어를 쓰는 미스테리한 여인

[황제의 옥새4] 톤 낮은 영어를 쓰는 미스테리한 여인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20-04-18 15:08
업데이트 2020-04-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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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발굴 구한말 배경 美 첩보소설 ‘황제의 옥새’ 4회

서울신문은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의 모습. 현재 이곳에는 서대문역 농협중앙회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전 서울의 중심호텔은 1902년 세워진 정동의 손탁호텔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호텔에서 대한제국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대거 이뤄졌다. 그럼에도 작가가 손탁호텔이 아닌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배경으로 택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조선에서 비주류였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사의 숨겨진 사건들을 회상한다는 취지를 살리려는 취지로 보인다. 실제로 이 호텔은 베델이 생전에 자주 이용하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신문 DB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의 모습. 현재 이곳에는 서대문역 농협중앙회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전 서울의 중심호텔은 1902년 세워진 정동의 손탁호텔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호텔에서 대한제국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 대거 이뤄졌다. 그럼에도 작가가 손탁호텔이 아닌 애스터하우스 호텔을 배경으로 택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조선에서 비주류였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사의 숨겨진 사건들을 회상한다는 취지를 살리려는 취지로 보인다. 실제로 이 호텔은 베델이 생전에 자주 이용하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신문 DB
나는 그녀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장난기 섞인 유쾌함이 미간을 스쳐 지나갔다.

“아! 서울에 사시나 보네요. 척 보니까 알겠어요.”

이 희귀한 도도새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호텔을 알려 주세요. 중국 상하이를 떠나기 전 서울 숙소를 알아보는 걸 깜박했거든요.”

“그러죠. 부인, 여기선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서대문 정거장 근처에 내 친구 루이가 운영하는 ‘애스터하우스’라는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건물터)이 있어요. 거기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주무셔야 하는데…외국인이 묵기에는 좀 불편하죠. 마침 제가 루이의 호텔로 가는 길인데, 괜찮으시다면…”

“네, 좋습니다. 거기서 잘게요.”

그녀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인력거 세 대를 불렀다. 한 대에는 이방인이 들고 온 짐을 실었고 다른 한 대에는 그녀가 탔다. 나는 마지막 인력거에 타고 길을 안내했다. 호텔로 가면서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모험을 상상했다.

‘내가 이 손님을 루이의 호텔에 있는 바에 데려가면 친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앞서 1905년에 만난 묘령의 여인(이 소설을 쓴 로버트 웰스 리치가 베델을 주인공으로 한 첫 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러시아 스파이)은 호텔에 도착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아 그 소식이 시내에 모두 퍼져 나갔다. 서울은 이렇게 모든 소문이 빠르게 번지는 곳이었다.

지금 이 중년 여성은 멸망을 눈 앞에 둔 대한제국의 수도로 찾아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분명 그녀는 새로 부임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선교회 본부(현 광화문 동화면세점 감리교 본부 빌딩)부터 찾아갔을 테니까. 그런데 관광객도 아니었다. 서울은 외국인들이 뭔가를 구경하러 오는 도시가 아니다. 설사 이곳에 오더라도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일본인 요리사를 따라 10명 안팎이 함께 다닐 뿐 혼자 다니지는 않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도시를 찾아 온 신비한 여성은 도시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젊음의 흔적이 사라진 얼굴을 화장으로 메웠지만 눈에서만큼은 청년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생각해보니 저다지도 깊고 인상적인 눈을 한 번 본 적이 있기는 하다. 1905년 가을 어느 날에 말이다.

(번역자주: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서 을사늑약 체결 직전 러시아 여성 스파이가 조선을 구하려고 나섰던 에피소드가 일어난 때를 뜻합니다.)

고급스럽게 다듬어진 보석에서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듯 이 여인의 눈동자도 그랬다. 새의 깃털을 단 스코트랜드식 모자를 쓰고 낡은 쟈켓과 예스런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젊음의 매력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자수정 같은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호텔로 들어서자 익살맞은 프랑스인 주인 루이(Looie·이 시기 호텔을 운영한 프랑스인 L.Martin의 실제 이름으로 추정)가 우리를 안내했다. 루이는 그녀에게 투숙 등록부를 작성하게 도우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미지의 여인을 데려 온 것에 대한 신기함과 눈에 확 띄는 벽안의 여인을 이리로 데려와 일본 경찰의 감시를 자초한 것에 대한 힐난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가 둔탁한 영어로 숙박비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호텔에 얼마나 묵을지 정하지 않았다며 장기투숙 여부는 여기서 편안한 서비스를 얼마나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저는 세계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입니다. 이 호텔이 값어치를 하는 곳인지 아닌지는 하루만 있어봐도 알 수 있죠.”

이 영국인은 등록부에 자신의 신상명세를 기록하며 여성 특유의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루이는 그녀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설득하며 객실로 안내했다. 사장이 직접 투숙객을 데려가자 조선인 벨보이들이 당황하며 여인을 뒤따랐다. 루이가 카운터로 돌아오자마자 등록부부터 열어봤다. 그녀가 뭐라고 썼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황제의 옥새’는 5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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