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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우산그늘/조은희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우산그늘/조은희

입력 2018-12-31 17:40
업데이트 2019-01-0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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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어두운 파란빛 조명. 조명은 무대 후면만 들어오며 그 빛은 관객석으로 뻗어나간다. 관객들은 소품과, 인물들의 그림자 속에서 무대를 관람한다. 무대 중앙을 제외한 후면의 극 상하수는 조명의 빛이 흐릿하다. 빛이 흐린 어둠 속에서 인물들은 대기를 할 수 있다.

프롤로그, 새미의 학원 앞 / 저녁



빗소리. 그 소리는 폭우같이 거세지만, 바람은 불지 않는다. 조명은 옅고 어두운 파란빛. 무대의 전면 상수에는 연성이 우산을 들고 있다. 무대 전면 하수에는 문준이 우산을 들고 있다. 새미, 등장. 입으로 학생이 할 법한 욕을 중얼거리며, 메고 있던 가방을 머리 위를 가리듯, 든다. 새미는 무대 전면 중앙으로 뛰어온다. 연성과 문준. 동시에 돌아본다. 새미가 중앙에 선다. 웅덩이를 밟은 듯, 첨벙 소리가 난다. 문준과 연성은 동시에 고개를 객석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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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 우새미! 아빠 왔다!

새미, 교복 바지가 젖은 듯. 욕을 하며 발을 들어 확인한다.

문준 아빠 왔다고! 바지 다 버렸네. 아침에 빨래했는데, 또 세탁기 돌려야 해?

연성 새미? 혹시 너가, 우새미 맞지?

새미 예? 맞는데요? 이렇게 비 오는 날. 절 왜요?

연성 나야. 김연성.

새미 누구냐니까요.

연성 네가 처음으로 손가락을 쥔 사람.

새미는 연성을 돌아본다. 새미를 제외한 모두 앞을 보고 있다. 문준의 우산이 눈에 띄게 처지듯, 내려간다. 문준의 얼굴이 우산에 가려진다.

1장, 새미의 집 / 저녁

무대 후면. 옅은 하늘빛 조명과 노란 조명이 무대를 밝힌다. 무대 전면에 소형 테이블과 큐빅 2개가 있다. 문준은 무대 후면에 있다. 문준은 젖은 우산을 펼친 채 조명 앞에 둔다. 우산 모양의 그림자가 바닥에 그려진다. 동시에 무대 상수에 있던 새미가 연성을 어둠 속에 뿌리쳐 놓고, 비교적 밝은 전면으로 들어온다. 문이 닫히는 소리. 연성은 문을 두드리는 손짓을 한다.

연성 (문 두드리며) 새미야! 문 열어!

새미 들어오지 마요! 이런 행동, 불법인 거 아시잖아요?

문준이 손을 소매에 닦으며 무대 전면으로 이동한다.

새미 아빠, 우산 또 저렇게 해놨어? 저러면 바닥에 물 떨어진다니까. 바닥이 원목이라 물 몇 방울이라도 나무가 이리저리 운다고 말했잖아.

문준 잘 기억하네? 내가 그랬었지. 나무라 이리저리 뒤틀린다고. 근데 물이야 닦으면 되는 거고. 우산은 접어서 보관하면 녹슬어.

새미 어차피 내일도 비 오거든요. 추적추적. 약해지겠지만요.

문준 갈색 얼룩보다는 낫지, 녹슬면 흉해지고, 가지고 다니기 싫어지니까.

쾅쾅쾅!

연성 (문 두드리며) 새미야. 김새미. 인터폰 통해서라도. 얘기만 하자. 아니면 얼굴이라도.

문준 이제는 성까지 바꿔버리네.

새미 여기는 우문준, 우새미. 우씨 집안이에요! 잘못 찾아오셨어요!

잠시 잠잠하다.

새미 아빠 밥은?

문준 아까 낮에 햇볕 아래에 누워 있었는데, 배가 금방 찬 것 같더라니. 다시 출출해졌어.

새미 요즘 따라 먹구름이 자주 껴서 그래.

문준 그렇지? 아빠가 이상한 거 아니지?

새미 물을 걸 물어 아빠. 18년간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문준 한 번은 아니고…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는 아니겠지?

새미 아빠도 수명은 있을 거 아냐. 나 학원에서 꼬부랑 글씨를 너무 봐서 그런가. 배가.

쾅쾅쾅!

연성 새미야! 너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 나 기다린다!

문준 (무시하려는 듯) 배고프지. 우리 야식 먹을까?

새미 오랜만에 배달 시켜 먹자! 나 조금만 더 시켜 먹으면 배달 앱에서 아이디 등급 올려준대. 어때 아빠? 피자?

문준 아냐. 내가 해 줄게. 금방이야. 군만두가 냉동실에 한가득이야. 자리 비좁아.

새미 아빠 힘들잖아요. 나도 이제 그것쯤은 알아. 뭐 시켜 먹을까? 그 전에 나 옷 갈아입고 올게.

문준 아빠가 이렇게 해 줄 수 있을 때 먹어. 나 늙으면 해 달라 해도 안 해 준다. 그땐 새미 네가 나한테 해 줘야지.

새미 말을 꼭 할아버지처럼 하네. 아빠 아직 한참 멀었어. 수명 240세 시대야. 120세 하프 세대도 훌쩍 넘은 지 오래구만.

문준 그건 너한테 해당되는 얘기고. 여튼 군만두 개수는 내가 알아서 한다? 다 먹어야 해?

새미 알겠어.

문준 무대 중앙 하수로 간다. 문준은 어둠 속에 있다. 문준은 무대 중앙을 등지고 있다. 문준은 앞치마를 맨다. 문준은 요리하는 시늉을 한다.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새미는 교복 와이셔츠 단추를 푼다. 단추를 풀자, 반팔티가 나온다. 새미가 교복 바지를 벗는다. 바지를 벗자 체육복이 나온다.

문준 교복 아무데나 벗어두지 말고! 방에 갖다 놔.

새미 개고 있어! 아빠는 맨날 보지도 않고 단정 지어!

새미는 큐빅 위에 교복을 아무렇게나 올려둔다. 새미는 무대 전면 상수로 이동한다.

새미 김이 많이 서렸네. 이러면 아빠가 계속 배고플 텐데.

새미는 호 입김을 분다. 와이셔츠 소매로 창문을 닦는 시늉을 한다. 그 행동은 느리게 진행된다. 그때, 쾅쾅쾅. 이번엔 아무 소리도 없다. 새미는 문준이 있는 무대 하수를 본다. 새미는 연신 눈치를 보며 연성이 있는 문으로 다가간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

연성 새미…!

새미 쉿, 아빠 요리하러 갔어요. 여기까지 따라오면 어떡해요. 이 집에 지금 못 들어오는 이유, 제가 보낸 봉투에 다 담겨 있을 텐데요.

연성 사정이 있었어. 네가 모를 사정.

새미 그래요. 그쪽의 유전자를 인공 난자에 넣을 때도 제가 이해해야 될 사정이 있었나요? 몰랐어요. 아직 고등학생이라.

연성 난 연구원이었어. 첫 연구가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어. 성공해서…기뻤지만. 그게 널 데려가기 전에는.

새미 말 조심해요. 문 닫기 전에.

연성 지금 말씨름하자고 만난 거 아니야. 난 알고 찾아갔어. 너의 아빠가 널 데리러 온다는 것을 알고. 적어도 내가 엄마라는 건 안 밝혔잖아. 얼굴도 제대로 못 봤을 거야. 우산을 모자마냥 푹 눌러쓰고 있던데.

새미 엄…이란 단어는 내 앞에서 쓰지 마세요. 밝혀주지 않은 덕분에 난 아빠한테 그 쪽이 게임 유저라고 밝힐 거예요. 제가 판 희귀 아이템을 돈 주고 사러 온 게임 유저요. 그러니까, 조용히 가 주세요. 나머지는 서류로 이야기하죠.

새미는 문을 쾅 닫는다. 문준이 프라이팬을 들고 등장한다.

문준 받침대 없어? 받침대.

새미는 받침대를 까는 시늉을 한다.

새미 아빠 잔치 열어? 무슨 만두가 북한산처럼.

문준 그 사람은 갔어?

새미 어?

새미, 군만두를 입에 넣는 시늉.

새미 (후하후하 대며) 아 뜨거! 음 그 사람? 내가 모바일 게임에 현질을 좀 해서, 아이템이 남더라고 그래서 판다고 했는데. 오죽 급했는지 우리 집 현관까지 온 거야. 그래서 돌려보냈어. 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급한지.

문준 갓 튀긴 만두, 허겁지겁 혀 데면서 먹은 놈이 할 말은 아니네요. 정말 간 거 맞아?

새미 갔어. 뒷모습도 봤는걸.

문준 일부러 그 사람 것도 구웠는데. 그래서 많아졌어. 다 먹을 수 있지? 아들?

둘의 젓가락이 왔다 갔다 하나, 힘이 없다. 새미는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문준 야 우새미. 너 설마 벌써 다 먹은 거야?

새미 …입맛이 없어.

문준 말도 안 돼. 이거 다 어떡해? 아까는 다 해치울 듯이 굴더니.

새미 내일 아침 반찬으로 하면 좋겠다. 그래서 일부러 남기는 거야.

문준 그래 그럼, 아빠가 다 먹는다. 숟가락 줄면 나야 환영이지.

새미 나 먼저 씻을게.

새미 무대 상수로 퇴장. 문준은 젓가락질을 하려다가 내려놓는다. 아까 새미가 서 있던 창문 뒤에 선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문준 날이 흐리네.

문준은 새미의 교복을 갠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2장, 새미의 학원 앞 / 낮

잔잔한 보슬비 소리. 연성이 우비를 입고 있다. 무대 상수에서 문준이 우산을 들고 등장.

연성 어?

문준 (혼잣말로)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보듯) 다 큰 어른이 부끄럽지도 않나.

연성 네?

문준 고등학생이랑 거래하는 거 말이에요.

연성 그게 워낙 희귀한 아이템이라. 제 시간, 돈, 다 쏟아붓는 겁니다.

문준 난 그 애의 아빠예요. 계속 이러시면.

연성 새미 말을 진짜 믿네요?

문준 계속 이러시면 신고할 겁니다. 접근금지 신청도 내릴 거고.

연성 내가 걔 본명을 어떻게 알 것 같아요?

문준 보나마나 은행 계좌겠죠. 입금을 하라고 새미가 본명을 알려 줬을 거니까.

연성 난 당신 본명도 알아요. 새미가 이름 하나는 잘 짓네요.

문준 현실 세계로 돌아오세요. 맨날 게임만 하니까 현실과 가상을 분간 못 하잖아요.

문준은 연성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다. 연성은 문준 쪽으로 돌아선다.

문준 제가 새미 대신 아이템값 배로 환불해 드릴 테니까. 거래 파기하세요.

연성 걔가 먼저 연락했어요. 저한테.

문준 그러니까 배로 쳐드린다구요. 없었던 일로 합시다.

연성 우산부터 위로 올리고, 절 보면서 말하세요.

문준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연성 새미도 궁금할 겁니다. 항상 비 오는 날만 데리러 오는 당신을요. 아무리 길이 물기로 미끄럽다고 해도요.

문준 내 아들이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냥 산책 겸 데리러 온 거죠. 우산도 따로따로 쓰는 마당에 무슨 소리예요.

연성 우산 그늘 아래 숨어서 아빠 노릇하는 거 지겹지 않아요?

우산이 올려져 완전히 얼굴이 드러난 문준. 연성 쪽으로 돌아선다.

연성 당신은 기호랄 것도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새미한테 맞춰서 제작되었으니까. 근데 요즘 좀 지겨울 겁니다.

연성이 문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간다. 우산끼리 부딪힌다.

연성 내가 당신 버전을 한 칸 올렸거든.

문준 이건 불법이야.

연성 원래 회수 절차예요. 알아요?

문준 새미 몸이 성장이 거의 됐다고 해도 완전한 성인이 아니에요. 회수는 2년도 더 남았다구요. 저는 새미가 대학 가는 거까지만 지켜볼 거예요.

연성 온몸이 뜨거워지지 않나요?

문준 네?

연성 햇빛 쬘 때, 햇빛보다 몸이 더 뜨거워지지 않냐구요. 그러니까 방금 한 따끈따끈한 밥보다 밥을 먹는 인간의 몸이 더 뜨거운 것처럼요.

연성은 문준의 표정을 살핀다.

연성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네. 다른 비유를 들어야 하나… 죄송하지만 당신 지능 지수가 몇 점이죠?

문준 예의를 지키세요.

연성 순수하게 묻는 거예요. 이런 질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아요. 당신 같은 존재를 위한 헌법이 나온 지 겨우 5년도 안 됐어요. 아직 개정 중이고요.

문준 새미가 더 잘 알 거예요. 당신 말대로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새미의 아빠니까. 지금 어떤 위치에서 당신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함부로 대할 자격 없습니다. 새미한테도 마찬가지예요.

연성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서, 당신도 인간처럼, 건조해진 거예요. 이유는 당신이 알 테죠.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할지도 모릅니다.

문준 인간처럼? (사이) 저는 아버지예요. 우린 잘 살고 있었어요. 아무 탈 없이요. 저는 그렇다 칩시다. 새미는요. 적어도 새미의 의사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성은 말이 없다.

문준 알면 돌아가세요. 새미가 어제에 이어 또 당신의 얼굴을 보기 전에요.

연성 정말 입을 떼기가 어렵군요.

문준 그래요. 신고가 두려우시겠죠.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그때, 무대 하수에 새미가 서 있다. 새미는 어둠 속에 있다.

연성 한 달 전, 새미가 절 찾아왔어요.

새미는 서류 봉투를 들고 있다.

문준 속임수 안 통해요.

연성 거짓말은 벌써 전부터 끝났어요.

새미의 팔이, 연성에게 서류 봉투를 건넨다. 연성, 봉투를 조심스럽게 받는다.

연성 연구실 직원이 조용히 저에게 건네더군요. 새미가 보낸 서류였어요. 저는 그것을 찬찬히 읽고 또 읽었어요. 마치 좋아하는 소설의 구절을 반복해서 읽듯이요.

새미 ‘父 우문준의 소유권을 가진 子 우새미는 출생원의 절차에 따라, 父 우문준을 회수함에 동의한다.’

연성 회수 담당이 내가 된 거예요. 그 아이가 손을 뻗어 감쌌던 손가락의 주인공인 내가. 엄마인 내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을 기회가 온 거예요.

새미 엄마, 이제 돌아올 때가 됐어요.

연성 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문준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새미는 어제도 내가 배고픈지 걱정했던 애예요. 그래서 아무데나 막 서명한 겁니다. 출생원에서 혹시 제 배터리를 갈아주지 않을까 해서요.

연성 도망가지 마세요.

문준 당신이 새미에 대해 무얼 말할 수 있죠? 손가락 하나 쥐어 주었다고 해서. 당신보다 두 마디 더 길어진 새미의 손이 그때와 같을 것 같나요?

빗소리가 거세진다. 문준은 연성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선다.

연성 아빠 노릇해서 얻은 데이터베이스, 하루면 다 읽을 수 있죠.

문준 그 데이터베이스는 하루아침에 쌓인 게 아니에요.

문준은 우산을 바닥에 떨어뜨리듯 내린다.

문준 난 새미가 자라는 모습을 메모리에 18년 동안 차곡차곡 쌓았어요. 결코 무시 못할 세월이에요. 그래서 엄마인 당신도 수없이 망설 였을 겁니다. 그러다 서류를 받자 용기가 났고 여기까지 왔겠죠. 근데 당신이 잊은 것이 있어요. 내 데이터베이스는 읽어도 새미가 쌓은 기억들은 읽을 수 없음을 말이에요.

문준은 우산을 접는다. 문준은 상수로 퇴장한다. 새미, 무대를 돌아 후면 하수에서 전면 중 앙으로 이동한다. 새미는 후드 모자를 쓰고 있다. 새미는 후드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다.

연성 새미야. 왜 비를 맞고 다녀. 감기 걸리게.

새미 얼굴이 다 젖은 건 제가 아닌 걸요. 꽤 오래 서 계셨나 봐요.

연성 우비가 그렇지 뭐. 만들 때, 머리는 안중에도 없었나 봐.

새미 이렇게 서 있으면 아빠가 절 데리러 왔다가도 발걸음을 돌리겠어요.

연성 네 아빠가 그렇게 쉽게 돌아서겠니.

새미 혹시 모르죠. 우리 아빠도 제가 이렇게 돌아설 줄은 몰랐겠죠. 그러니까 아빠도, 저도 서로 모르는 거예요.

연성 생각이 많아졌어. 혼란스러워.

새미 아빠가 나가면, 본인이 빈자리를 채울 거라고 기대하시지 않았나요?

연성 오래된 일기도 망설임 없이 찢는 사람들이 있지. 우리 엄마도 그랬어. 새미 너는? 나라고 다를까?

새미 버려진 건 당신이 아니에요. 나라구요. 내가 태어나서 당신이 엄마가 되었잖아요. 근데 당신이 엄마라서 날 태어나게 한 것처럼, 괴로워하지 말란 말이에요.

연성 괴로워할 자격 없는 거 알아. 그땐 엄마라는 생각보다, 실험이 성공한 기쁨, 연구원으로서의 성취감이 날 지배했어. 지금에서야 두려울 뿐이야. 너도 혹시 날… 갈아 끼우듯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새미 잠시 말이 없다.

새미 비가 점점 그치고 있어요. 빗방울 떨어지는 간격이, 뜸하네요.

연성 지금쯤이면, 네 아빠가 집에 도착했겠지.

새미 데리러 왔었군요.

연성 그래. 너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새미 맞아요. 아빠는 왜 비오는 날이면 날 데리러 왔을까요? 전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어요. 비 오는 날에는 우산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 눈에 안 보이거든요. 절 괴롭히던 중학교 동창을 만나도 우산을 앞으로 조금만 더 내리면 대통령도 부러워할 벙커가 돼요. 숨은 거라 해도 좋아요. 근데, 아빠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연성 이제 가자. 집으로.

새미 제 선에서 마무리하죠.

연성 너가 부추기겠다고?

새미 네. 아빠는 항상 구름이 없는 날을 좋아했어요. 그런 날에 집에 오면, 아빠는 창가에 서 있었죠.

연성 정말 너가 할 수 있겠어?

새미 내일 봬요.

새미, 후드 모자를 벗고 무대 후면 상수로 간다. 새미는 어둠에 잠긴다. 연성, 무대 하수로 가서 퇴장한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3장, 아빠의 방 / 밤

드라이어기 소리. 무대가 환해지면, 새미가 문준의 머리를 말려 주고 있다. 새미는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문준은 비에 젖은 생쥐 꼴이다. 새미는 드라이어기를 내려놓는다. 새미는 수건으로 아빠의 머리카락 나머지를 닦는다.

문준 이러니까 졸리다. 네가 어릴 때 조는 이유가 있었구나. 드라이어기 소리가 시끄러운 데도 휘청휘청.

새미 자, 다 끝났어.

문준 이제 자리 바꾸자.

문준은 드라이어기를 손에 든다.

새미 내가 애야?

문준 다 큰 애다. 다 큰 애. 앉아.

새미 됐어. 나 수학 공부 좀더 하다 자려고. 그리고 나 머리도 안 젖었잖아.

문준 그럼 부엌 불은 네가 꺼라. 아빠 먼저 잔다.

새미 오늘은 안 붙잡네? 맨날 아빠 방에서 자라더니.

문준 너도 이제 다 컸잖아.

새미 일찍도 알아보셨네.

새미 무대 후면 상수로 이동. 스위치 소리. 새미, 베개를 들고 무대 전면 하수로 온다. 새미, 베개를 바닥에 놓고 눕는다. 새미는 관객석과 평행으로, 옆으로 누워 있다.

새미 부엌에 불 껐어.

문준 새미 네가 웬일이야. 달력에다 표시해야 하나. 파란펜으로 동그라미 치고, 아니, 동그라미 두 개.

새미 근데 아빠.

문준 응?

새미 우산은 말려 뒀어?

문준 그러엄.

새미 내일은 비 안 온대.

문준 ….

새미 우산 어디다 놔 뒀어? 거실에 없던데.

문준 저기, 신발장 안쪽에 넣어뒀어. 먼지 쌓이지 말라고.

새미 우산 안 젖은 거 알아.

문준은 말이 없다.

새미 아빠 비 맞는 거 싫어하잖아.

문준 비가 그친 줄 알았는데 계속 온 거뿐이야. 조금씩 맞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새미 우산이 아빠보다 귀해? 우산은 커버까지 씌워서 가져와 놓고, 아빠는 비 쫄딱 맞으면 무슨 소용이야.

문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우산을 신주 단지 모시는 거 마냥… 그렇게 품 안에 감싸고 집까지 걸어왔어.

새미 아빠도 아빠 생각 좀 해.

문준 (용기 내어) 이제 우산들 그만 펼쳐 놓고, 접어서 보관할 때가 온 것 같아.

새미, 무대 후면 쪽으로 돌아 눕는다.

새미 비 오는 날이 싫다는 말이야?

문준 그건 아니야. 여전히 좋아.

새미 그럼 내일 만날까. 아빠?

문준 자자, 새미야. 늦었다.

새미 나 아직 잘 생각 없어. 아빠는 항상 내가 잠드는 거 보고 잤잖아.

문준 내일은 맑아? 구름 한 점 없이?

새미 응, 쨍쨍해서 더울 수도 있대. 그래도 목도리는 챙기래. 이게 무슨 말이야?

문준 겉옷도 챙겨. 벗었다가 입을 수도 있는 거.

새미 걷기만 해도 배부를걸. 아빠 오랜만에 포식하겠네.

문준 새미야. 늦었다. 자자. 내일 학교 안 가니?

새미 이런 날 두 번 없어. 밤새도록 얘기하다 잘 줄 알았는데. 내가 다 큰 게 아니라 아빠가 늙은 거 같아. 내가 다시 이 방에서 자나 봐봐.

새미는 일어나서 불을 끈다. 스위치 소리. 조명이 어두워진다. 문준, 새미 머리맡에 간다. 문준은 새미의 베개를 뺀다.

새미 아 씨, 아빠 베개 있잖아! 내 거 돌려줘.

문준 오늘은 아빠 자는 거 봐줘. 먼저 잘게.

문준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새미와 데칼코마니처럼 눕는다.

새미 갈 거야, 말 거야.

문준 너 나 때문에 억지로 가는 거 아니지.

새미 갈 거야 말 거야.

문준은 몸을 일으킨다.

문준 그럼, 돗자리를 준비해 줘.

새미 좋아. 집에 있어.

문준 연두색으로.

새미 아빠가 언제부터 색깔을 신경 썼다고 그래. 우리 집 돗자리는 하얀색이야.

문준 연두색이 산뜻하니까. 그리고,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색이야.

새미 그럼 내일 나 학교 마치면 3시쯤….

문준 1시 30분. 나날 공원.

새미 나 그때 수업 중인데. 아는 사람이 왜 그래.

문준 조퇴해. 담당 선생님한테 현장 체험 학습이라고 하든가. 아빠가 허락했다고.

새미는 말이 없다.

새미 아빠, 이런 적 처음인 것 같아.

문준 나도 익숙하지 않아.

새미 아빠 말고, 나 학교 조퇴하는 거 처음이라고.

문준 하긴 이때까지 개근상을 훈장처럼 모아 왔었지.

새미 (졸린 목소리로) 아빠는 뭘 모았어.

문준 유치원 졸업장이랑, 중학교 졸업장이랑 이제 고등학교….

새미 (거의 자는 목소리로) 그건 우새미. 내 거고. 아빠 거 말이야.

문준 내 거? 난 내 서랍장도 없어.

문준은 자리에 앉는다.

문준 우새미. 자? 아들?

새미는 몸을 뒤척인다.

문준 내일 생기겠네. 연두색 돗자리. 그 위에 나는 누워야지.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로. 하늘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어두워져서 별이 뜨면, 그제서야 집에 돌아올 거야. 비 오던 날만 외출했던 우리를, 나를 잊고 싶어.

조명이 어두워진다. 연성, 무대 상수 어둠 속 서 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문준과 새미는 듣지 못한다. 연성은 새미가 주었던 서류 봉투를 안고 있다. 연성은 무대 후면 상수로, 다시 전면의 하수로 왔다 갔다 한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연성은 문을 두드리려다가 만다. 그러다 결심했는지, 문 밑으로 서류를 밀어 넣는다.

4장, 새미의 집 / 낮

조명이 밝아지자, 서류 봉투는 사라지고 없다. 문준은 무대 전면에 있다. 문준은 분무기를 허공에 뿌리며, 곱게 접힌 수건으로 창문을 닦는 시늉을 한다. 창문이 잘 닦이지 않는지 인상을 쓴다.

문준 도대체 창문 청소는 언제쯤 하는 거야. 관리비는 누구 콧구멍에 들어갔는지. 원.

새미, 집에 들어온다.

문준 왔어?

새미, 대답 없다. 새미는 가방을 벗는다. 새미는 가방 정리를 한다.

문준 점심은.

새미 공원에서 기다렸어.

문준 아빠는 점심 먹었는데.

새미 아빠랑 점심 먹을 줄 알았어. 그래서 밥 먹기 전에 조퇴했다. 왜.

문준 오늘 날씨 좋은데 공원은 좀 돌아보고 왔어?

새미 응, 덕분에.

문준, 분무기를 뿌린다.

새미 시간 헷갈린 거 아니지?

문준 지금이 몇 신데?

새미 오후 3시.

문준 1시 30분에 만나자며.

새미 나 1시 30분부터 3시까지 공원 정문에서 기다렸어. 그러다가 아빠가 길 잃은 게 아닌가 싶어서 그 넓은 공원을 1시간 반 동안 돌아다녔고. 다리가 아프길래 공원 벤치에서 쉬고 있었는데 공원 시계 보고 알았어. 아, 아빠는 집에 있겠구나.

문준 길을 잃을 리가 없지. 몇 번이나 갔었는데.

새미 아주 오래전이잖아.

문준 오래전은 무슨, 3년도 안 됐어.

새미 미안.

문준, 새미를 돌아본다. 문준은 새미에게 간다.

문준 그거 때문이 아냐. 미안해할 필요 없어.

새미 힘들었어?

문준은 다시 무대 전면으로 와서, 수건으로 창문을 닦는다.

새미 뭐 때문인데?

문준 몰라, 내가 두려웠는지도 모르지.

새미 …사람들이.

문준 응,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야.

새미 알아 듣게 설명해 줘.

창문을 닦는 문준의 행동이 멈춘다.

문준 나만 동의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지?

새미가 문준에게 다가간다.

새미 아빠, 난.

문준 돌아가면 난 무엇을 할까 생각 중이야.

새미 회수, 맞아. 돌아가는 건 맞아. 근데 이건 달라.

문준 네가 직접 서류에 서명을 해 놓고, 지금 와서 가지 말라는 거야?

문준은 분무기를 든다. 격하게 분무기를 뿌리다가 수건과 분무기를 힘 없이 늘어뜨린다.

새미 아빠가 달라지게 될 거랬어. 평범하게.

문준 오늘 새벽, 네 손에서 떠났던 서류가 내 손으로 돌아왔어. 나와 반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날 도우려고 한 거야.

새미 그 사람은 내 엄마가 아니야. 유전자만 같지.

문준 인정하긴 싫지만 이걸 돌려주는 순간은 엄마였어. 넌 그걸 알아야 해. 아들.

새미 나는 엄마가 없어!

문준 그 말이 내 가슴도 뚫는다는 걸 아니?

새미 아빠는 구름 없는 날씨를 좋아했지. 나는 그걸 알면서도, 비 오는 날만 아빠가 나갔으면 했어. 아니, 아빠를 숨기고 싶었어! 엄마가 있는 친구들한테서 아빠를 비밀로 하고 싶었어.

문준 내 가슴이 건조해졌다고 그랬는데. 축축하다.

문준이 무대 하수로 가려고 한다. 새미는 아빠를 붙잡는다.

문준 널 뿌리치게 하지 마.

새미 아빠가 창문을 닦을 때조차, 나는 아빠가 맑은 하늘을 보는 게 싫었어. 혹시 나가고 싶은 거 아닐까? 안 돼, 모른 척하자. 난 못 본 거야. 아빠는 그냥 창 밖을 보는 거야. 바깥에 뛰어노는 애들 소리가 시끄러워서 보는 거야.

문준 나는 눈물 날 정도로 햇빛을 쳐다봤어.

새미 떠날까 봐 무서웠어.

문준 떠날까 봐 무서울 정도였으면 날 떠나 보내는 게 아니라 붙잡았어야지.

새미 ….

문준 새미 네 손으로 직접 서명했어. 내가 아빠가 아니게 해 달라고.

새미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붙잡을 수가 없었어.

새미는 문준을 놓는다. 새미의 고개가 내려 간다.

문준 나 집 청소 하는 것 좀 도와줄래?

새미 바닥에 먼지 한 톨 없어.

문준 내 물건, 정리하려고 했는데 정리할 게 없더라고.

새미 도와줄게.

새미, 무대 하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새미는 무대 바닥에 앉아, 밝은 전면에 샴푸, 치약, 폼클린징을 옮긴다.

새미 뭐 필요해? 샴푸, 치약, 폼클린징?

문준 이거 다 네 거잖아.

새미 아빠랑 같이 쓰던 거야.

문준 새로 사면 돼. 출생원 앞에도 편의점은 있겠지.

새미 피부에 안 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빠 피부 민감하면서.

문준 그럼 너 뭐 쓸 건데, 만들기라도 할 거야?

새미 그렇네…. 벌써 화장실이 텅 비었다. 안 그럼, 요리 도구는 어때. 프라이팬 전자레 인지.

새미 이번에는 무대 후면 하수로 사라진다. 곧이어 우당탕탕 소리. 문준은 그쪽으로 가려다가 만다. 새미 무대로 돌아온다.

새미 다 가져가 아빠.

문준 주방이 텅 빌 거야.

새미 어차피 난 요리 못 해. 그럼 내 방은? 뭐 가져갈 게 없을까. 종이?

문준 집 텅 비고 싶어? 그만해. 청소하는 법 알려줄 테니까.

새미 이거 봐. 이런데 뭐가 챙길 게 없다는 거야? 아빠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지 마. 이렇게나 많으니까.

새미 이번에는 무대 상수로 향한다. 우산을 들고 나오는 새미.

문준 어릴 적 썼던 우산이네.

새미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녹이 하나도 안 슬었네.

문준 작지. 그때도 잘 말려서 넣었거든.

새미는 우산을 펼쳐 본다. 새미는 문준에게 씌워 본다. 문준이 새미의 우산을 그러쥔다.

새미 하나도 안 가려져. 비에 다 젖겠어.

새미는 문준의 우산을 가져온다.

새미 그럼 이게 아빠 거지?

밝은 색의 우산. 새미가 우산을 펼친다.

새미 아빠 우산….

문준 크지?

새미 녹이 다 슬어 있었네.

문준 ….

새미 내 것만 말렸었어?

문준 너 건 예쁘게 잘 말렸지. 맑을 때도 넌 우산을 썼으니까. 아들이 매일매일 쓰는 건데. 바싹 말려야 하잖아.

새미 아빠가 가면. (사이) 내 우산도 저렇게 될 거야. 더이상 쓰지 않을 거니까. 아빠가 아닌, 문준으로 돌아오면 그 우산을 보여줄게.

문준 녹슬면, 보기 흉해. 가지고 다니고 싶지 않을 만큼.

새미 갈 거지?

문준 아니.

새미 ….

문준 내가 어딜 가. 여기 전부 있는데.

새미 우산을 손에서 놓아버린다. 전면에서 후면순으로 조명이 밝아진다. 무대가 완전히 환해진다. 문준, 새미 서로 포옹하려다가, 새미가 어깨동무를 한다.

새미 안지 마. 나 다 컸어.

문준 이때 아니면 언제 안아 보냐.

문준은 새미를 포옹한다. 새미도 포옹한다. 암전.
2019-01-01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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