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와 원숭이의 대화로 본 홀로코스트

당나귀와 원숭이의 대화로 본 홀로코스트

입력 2013-06-19 00:00
업데이트 2013-06-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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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텔 ‘20세기의 셔츠’

‘홀로코스트에는 왜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는가?’ 작가의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대다수의 작품들은 기록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작가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증언 문학이었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임레 케르테스의 작품 역시 작가가 수용소에 끌려간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것은 대학살의 현실이 상상력을 적용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되묻는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상상력을 왜 홀로코스트에는 적용할 수 없는가?’

‘20세기의 셔츠’(작가정신 펴냄)의 주인공 헨리는 작가다. 픽션과 논픽션을 절반씩 뒤섞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내려 하지만 출판사의 냉대를 받고 체념한다. 아내와 낯선 도시로 이주한 그는 어느 날 헨리라는 동명의 독자에게 ‘20세기의 셔츠’라는 희곡을 전해 받는다. 독자의 직업은 박제사. 그가 쓴 희곡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헨리는 희곡에 빠져들며 묘한 분위기를 가진 박제사의 비밀을 조금씩 알아간다.

호랑이와 구명 보트에 오른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파이 이야기’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얀 마텔은 이번 작품에도 동물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박제로 만든 모든 동물은 과거의 해석”이라고 말하는 박제사는 희곡을 통해 죽은 동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버질과 베아트리스는 홀로코스트라는 알레고리를 두고 베케트풍의 무위한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겪은 일에 어떤 이름이 붙여질까?” “괜찮은 질문인데.” “대사건?” “너무 밋밋해.” “대홍수는 어때?” “날씨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대재앙?” “그 말은 홍수나 지진에나 쓰는 말이야.”

마텔은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린다. 그는 “홀로코스트는 언제나 홀로코스트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우화적 기법으로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고 밝혔다. 작가의 말과 소설의 형식이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인용문을 연상시킨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2013-06-19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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