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바람났다는데… 진실은 어디에

아내가 바람났다는데… 진실은 어디에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입력 2023-12-15 23:07
수정 2023-12-1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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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은 스텔라(왼쪽)의 외도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컬렉션’은 스텔라(왼쪽)의 외도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새벽에 한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 지인이라며 빌을 바꿔 달라고 한다. 대신 받은 해리는 누구냐고 묻지만 전화를 건 남자는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새벽에 전화해야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수상한 전화는 다시 걸려 온다. 이번엔 빌이 직접 받았고 남자는 빌을 찾아가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빌은 무슨 일인지 전화를 받고 곧바로 외출한다. 남자는 집에 도착했지만 새벽에 전화를 대신 받은 해리만 만날 뿐이다.

갈수록 수상한 이 사연의 중심에는 불륜이 있다. 전화를 건 남자는 제임스. 그는 아내 스텔라가 빌과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해 이런 일을 벌였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니 당장이라도 찾아가 패주고 싶은 마음이었겠고 그제야 관객들은 제임스가 새벽에 다짜고짜 전화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지난 1~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선보인 서울시극단의 연극 ‘컬렉션’은 빌과 스텔라가 보낸 그날 밤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200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극작가 해럴드 핀터(1930~2008)가 1961년 썼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확증편향적인 모습을 날카롭게 꼬집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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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왼쪽)는 아내의 불륜 상대가 빌(오른쪽)이라 생각하고 빌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제임스(왼쪽)는 아내의 불륜 상대가 빌(오른쪽)이라 생각하고 빌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빌과 해리는 동성 커플, 제임스와 스텔라는 부부다. 빌과 스텔라의 외도가 사건의 중심이니 막장극이 펼쳐질 것 같은데 의외로 인물들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나마 제임스가 상상력을 동원해 빌에게 스텔라와 있던 일을 묘사하며 꼬치꼬치 캐묻지만 빌은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명확하게 답해주지 않는다. 보통의 작품에서라면 싸움이 벌어지는 게 상식적일 텐데 어쩐 일인지 그냥 그대로 모호하게 넘어간다.

이야기는 네 사람이 서로를 속이고 의심하고 동정하는 과정과 함께 위태롭게 흘러간다. 마치 진실게임을 벌이는 것 같은 전개가 이어진다. 빌은 엘리베이터에서 안고 키스했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원수여야 할 빌과 제임스는 술잔을 기울이며 각별한 사이가 된다.

남편에게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랐다”고 말하며 우는 스텔라의 모습은 외로워서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는 암시도 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인 빌과 스텔라가 눈이 맞았는지 치열하게 추적해가지만 결국에는 결론짓지 않은 채 극이 끝나고 관객들도 혼란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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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오른쪽)가 스텔라를 찾아가봐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해리(오른쪽)가 스텔라를 찾아가봐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게 뭘까 곱씹다 보면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정보가 넘쳐나고 서로가 보고 싶은 것만 진실로 여기며 사는 시대상을 읽게 된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사실 대신 마음에 얼마나 드는지가 더 중요해진 사회는 얼마나 진실한가. “그게 진실이지? 아니야?” 묻는 제임스의 마지막 대사가 여운을 남긴다.

변유정 연출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가짜가 얼마든지 진짜처럼 보일 수 있는 시대에 잘 맞는다. 어쩌면 1960년대에 이 작품을 쓴 해럴드 핀터가 이러한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핀터는 사뮈엘 베케트(1906~1989)와 함께 ‘부조리극’ 대가로 꼽히는 작가다. 변 연출의 말처럼 60년 전 쓴 작품이지만 시대를 관통해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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