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귀신 거울/조영희

[엄마와 읽는 동화] 귀신 거울/조영희

입력 2009-08-10 00:00
수정 2009-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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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슈퍼마켓 통조림 코너의 한쪽 기둥에는 길쭉한 거울이 붙어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춰 볼 수 있는 멋진 거울입니다. 멋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통조림을 고르다가도 거울 앞에 우뚝 멈춰 섭니다. 그러고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다가 흐뭇한 얼굴로 돌아섭니다. 엄마를 따라온 아기들은 거울을 때리며 장난치는 걸 좋아합니다.

늦은 오후, 소은이가 슈퍼마켓에 들어옵니다. 소은이는 묵직한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습니다. 피아노 학원에 수학 학원, 영어 학원, 미술 학원, 논술 학원, 그리고 다시 영어회화 학원에 갔다가 한자 학원까지 모두 들르려면 책만 해도 예닐곱 권은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소은이는 빵과 과자가 있는 선반에 즐겨 갑니다. 크림이 잔뜩 든 빵이나 부드러운 초코 과자를 고릅니다. 저녁밥 대신입니다. 여러 학원을 도느라 저녁밥을 따로 챙겨 먹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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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색다른 걸 먹어 볼까?”

그래서 고른 것이 땅콩크림빵입니다. 냉장고에선 땅콩크림빵에 잘 어울리는 콜라를 꺼냈습니다.

“으악!”

통조림 선반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소은이도 빵과 콜라를 양 손에 들고 뛰어갔습니다.

길쭉한 거울 앞에 운동복 차림의 아저씨가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귤색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뛰어왔습니다.

“심장마비인가?”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수군거렸습니다. 소은이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저기, 거울에, 귀, 귀, 귀신이…….”

아저씨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거울이 어쨌다고요? 귀신, 뭐라고요?”

직원이 아저씨의 입에 귀를 바싹 갖다 댔습니다.

“거울 속에 귀신이 나타났어요.”

아저씨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직원이 피식 웃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구먼.”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습니다.

“저걸 보란 말이오!”

참다못한 아저씨가 직원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아 거울 쪽으로 돌려 주었습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거울을 봤습니다.

거울 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운동복 아저씨의 모습도, 직원의 모습도, 주변에 모인 그 어떤 사람의 모습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슈퍼마켓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가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 경찰서에 전화를 거는 사람, 귀신이 나타났어도 필요한 건 사야 한다며 계산대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소은이가 서 있는 쪽에서는 거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귀신이라고?’

소은이는 슬금슬금 거울 쪽으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거울 앞에 선 순간, 소은이의 눈에 낯선 아이가 보였습니다. 보라색 옷에 보라색 화장을 한 아이였습니다. 소은이는 보라색 아이의 눈을 보았고, 보라색 아이는 소은이의 눈을 보았습니다.

“얘야, 위험해.”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소은이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소은이는 이때 빵과 콜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슈퍼마켓 정문에는 못 보던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안전하고 깨끗한 우리 슈퍼마켓을 앞으로도 많이 이용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가게 안은 무척 한가합니다. 손님보다 직원이 많아 보일 정도입니다.

소은이는 오늘도 빵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빵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소은이는 보라색 아이를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아이였지만 눈빛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 거울이 보입니다. 지금 소은이에겐 거울의 옆면만 보일 뿐입니다. 소은이는 가방을 고쳐 멥니다. 그러고 거울로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좋습니다. 아직은 거울 앞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은이는 딱 한 걸음을 남겨두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제는 얼른 피해서 괜찮았지만 나쁜 귀신이면 어떡하지?’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귤색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계산대 주위에 몰려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땐 계산대로 뛰어가면 될 거야.’

소은이는 가방 끈을 꽉 쥐고 숨을 크게 들이켭니다. 눈을 꼭 감고 발을 크게 내딛습니다.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슬며시 눈을 뜹니다.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보라색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은이가 보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울 속엔 노란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가 서 있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소은이는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접었습니다. 거울 속의 할머니도 똑같이 했습니다.

소은이는 거울에 좀 더 가까이 갔습니다. 할머니도 소은이에게 다가왔습니다.

“할머닌 누구예요?”

할머니는 소은이의 입 모양을 따라할 뿐,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소은이는 손을 뻗어 거울을 만졌습니다. 그저 차가운 거울일 뿐이었습니다.

소은이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이 어딘가 소은이를 닮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소은이와 닮은 얼굴이라 무섭지 않았나 봅니다.

거울을 톡톡 두드려 보았습니다. 거울 속의 할머니도 거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다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젊은 남자가 보였습니다. 이 남자도 소은이를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소은이의 얼굴이 발그레해졌습니다. 미래의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어떤 것을 보여줄 건가?’

다시 한 번 거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이번엔 어제 소은이를 가게 밖으로 끌고나갔던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거울은 소은이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소은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다시 톡톡.

아주머니의 모습이 사라지고, 거울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톡톡.

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톡톡.

그대로였습니다.

톡톡.

“그만 좀 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피곤하다고. 피곤해.”

거울 속에 보라색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아!”

소은이는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직 달아날 정도로 나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곳은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보라색 아이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서 있는 폼도 매우 삐딱했습니다.

“너 같은 장난꾸러기 때문에 더 피곤하고 말이야. 어제는 요만한 아기가 두들겨대더니 오늘은 너니?”

소은이는 발을 움찔했습니다. 보라색 아이가 가까이 올 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하긴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이런 곳에 걸린 나의 운명을 탓해야지.”

보라색 아이는 팔짱을 낀 채 통조림 선반에 기댔습니다. 그러고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궁금한 게 있어.”

소은이가 오랜 침묵을 깼습니다. 겨우 용기를 냈지만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습니다. 뭔가 잘못 말하면 마구 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뭔데?”

“넌 누구야?”

보라색 아이가 피식 웃었습니다.

“보고도 몰라? 거울이야.”

“그런데 왜 이상한 걸 보여줘? 거울이면 나를 보여줘야지.”

“피곤해서 그래. 용량 초과라고. 누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겠어.”

보라색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아까 보여준 건 뭐야? 내 앞날이야?”

“아까 뭐?”

보라색 아이는 눈을 한 번 치켜뜨고는 크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너의 앞날이냐고?”

소은이는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았습니다.

“처음 보았던 할머니는 윗동네에 사는 할머니야.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데, 요즘은 통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어. 그때 마침 네가 나타나서 잘못 보여준 거지. 실수한 거야.”

“그래…….”

소은이는 왠지 시무룩해졌습니다.

“두 번째의 젊은 남자는 이곳 직원이야. 저길 봐.”

보라색 아이가 가리키는 곳엔 정말 그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손님이 없어서 매우 따분해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본 사람은…….”

“나도 알아.”

“그래, 그뿐만이 아니야. 하루에도 수 천 명이 내 앞을 지나가. 나는 그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시 보여주는 거야.”

보라색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잿빛이 섞인 보라는 더욱 슬퍼 보였습니다.

“이젠 지쳤어. 새로운 얼굴을 기억하기는커녕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헷갈릴 지경이야.”

보라색 아이는 거울 속에 있는 통조림 선반 위에 사뿐히 올라앉았습니다. 소은이는 보라색 아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은이도 날마다 새로운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고 싶어.”

“네가 어떻게?”

보라색 아이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솔직히 소은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전부 다 잊어버리면 되잖아. 컴퓨터를 포맷하듯이.”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었습니다.

“네 눈엔 내가 컴퓨터로 보이니?”

보라색 아이는 소은이의 말이 우습기만 했습니다.

“기억을 털어낼 만한 방법이 없을까?”

소은이는 보라색 아이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털어낸다……, 털어낸다…….”

골똘히 생각하던 소은이가 갑자기 청소도구를 파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소은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총채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걸로 뭘 어쩌려고?”

“잘될지 모르겠어.”

소은이는 양손으로 총채를 잡고 먼지를 털듯 거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마치 먼지가 되어 거울 밖으로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담임선생님도 보이고, 가장 좋아하는 친구도 보이고, 이 근처에 산다는 유명한 연예인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엄마도 보이고, 마침내 소은이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소은이의 모습은 총채로 아무리 두드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보세요?”

거울을 톡톡 두드려 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보라색 아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사라도 해둘걸.”

소은이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기억을 모두 털어내고 즐거워할 보라색 아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학원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왠지 학원을 모두 빼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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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조영희씨
동화작가 조영희씨
학원을 아홉 군데나 다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의 작은 머릿속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이에겐 비어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어있는 시간은 창조를 위한 시간입니다. 아이가 빈 시간을 충분히 갖길 바라며 이 글을 썼습니다.

●작가약력

대학교에서 건축공학, 시각디자인 전공. 2004년 중랑구 사이버 신춘문예 ‘풍선 잃은 아이’로 당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책을 돌려주세요’로 당선. 대전일보 신춘문예 ‘강에 사는 고래’ 로 당선. 단편모음집 ‘수선된 아이’, ‘지난밤 학교에서 생긴 일’ 등.
2009-08-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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