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는 허구” 결론 아직 이르다

“서동요는 허구” 결론 아직 이르다

입력 2009-01-21 00:00
수정 2009-01-2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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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유물 발굴로 논란 가열

익산 미륵사 석탑에서 창건 당시의 전말을 담은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출토됨에 따라 창건 주체가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라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륵사 석탑은 서동설화에 나타난 선화공주가 아닌, 무왕 당시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가 서기 639년 세운 것으로 사리봉안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리봉안기를 처음 해석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말한 대로 “훗날 무왕이 되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결혼 설화는 후대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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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터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은 미륵사 창건에 얽힌 설화를 단숨에 역사로 끌어올려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시했다. 사진은 지난 19일 미륵사터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처음 공개된 금제 사리호. 익산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익산 미륵사터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은 미륵사 창건에 얽힌 설화를 단숨에 역사로 끌어올려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시했다. 사진은 지난 19일 미륵사터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처음 공개된 금제 사리호.
익산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하지만 사리봉안기의 출토로 곧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 두 사람의 미륵사 창건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사리봉안기는 미륵사터 석탑이 완공된 서기 639년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륵사의 건립을 시작한 단계의 상황은 전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륵사가 백제 무왕 시대에 지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대부분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선화공주 대목만을 들어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번져가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미륵사 사리봉안기는 일단 무왕의 부인이 몇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택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미륵사는 3개의 영역이 하나의 사찰을 이루는 삼원(三院) 형식이라는 점에서, 해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서탑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가람만 사택씨 왕후가 짓고 나머지는 다른 왕후가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미륵사에선 이번 발굴 이전에 기축년(629)이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절의 중앙과 동서의 삼원구조는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이번에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를 꼭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백제시대 사리장엄이 발견된 부여 왕흥사도 서기 600년부터 634년까지 창건에 35년이 걸린 것으로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는 만큼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는 최소한 40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따라서 재위기간이 서기 600년에서 641년으로 매우 길었던 무왕 시대에는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 이전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미륵사 창건 당시의 왕비가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사리봉안기의 출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무왕이 40년 이상 재위한 만큼 선화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왕비를 들였을 것이고, 그 새로운 왕비가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사택덕적의 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사찰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발원문에는 왕은 물론 태자의 안녕을 비는 대목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에는 태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근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무왕이 새로 맞이한 왕비가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아들을 낳았어도 태자로 책봉되기는 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미륵사는 한 왕비 집안이 재력을 투입해 지은 사찰이라기보다는 백제의 국가적 역량 총동원하여 조성한 사찰”이라면서 “따라서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창건의 전모를 보여준다기보다는 무왕의 젊은 왕비가 이전의 왕비, 이를테면 선화공주의 흔적을 지워버린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교수는 그동안 알려진 무왕의 장인인 좌평 ‘사택적덕(沙積德)’은 ‘사탁적덕’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009-01-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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