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원색너머로 삶의 에너지가 물씬
붓을 든 채 화가는 낯선 이국 하늘 밑을 서성이고 다녔다. 쿠바,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정열로 가득찬 남미의 공기를 들숨날숨 들이켜고 내뱉으며, 어쩌면 그대로 영원히 낯선 길 위에 서있어도 좋겠다고 마음 먹었는지 모른다. 그 뜨거웠던 이국의 기록들을 화폭에 담았다. 화포(畵布) 구석구석이 온통 붉고 푸른 원색의 정열에 감염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화폭의 시인’ 김병종(55·서울대 미대 교수) 작가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꼭 3년 만이다.‘길 위에서’라 제목을 붙인 전시는 작가의 말대로 “3년 농사의 결실”이다. 그런데 왜 남미였을까.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우리 정서에 가장 편히 오버랩 되는 곳이 남미라 생각했어요. 후기 산업사회에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가 그 곳엔 남아 있거든요.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성, 여전히 황홀한 자연미…. 우리의 옛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어요.”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빠져 살던 대학 시절부터 남미는 동경의 땅이었다.“쿠바에서 작품활동을 주로 했던 헤밍웨이, 강렬한 개성을 작품에 투영한 프리다 칼로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배경공간으로 삼았던 쿠바의 바닷가 마을을 돌아본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운 예술의 기억이 그를 몰고 간다.
작렬하는 태양빛이 옮겨진 덕분에 전시장은 눈이 부시다. 선인장너머로 잔잔한 옥빛 바닷물에 아이 하나 풍덩 뛰어들거나(‘카리브 연가’), 영화 속에서 막 튀어 나온 듯한 카우보이는 선인장과 들소를 벗삼고(‘멕시코 기행’), 거세게 내리치는 폭포의 물줄기는 금방이라도 화폭 밖으로 확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이과수 폭포’). 서민들의 잔잔한 삶, 기억에 돋을새김된 풍경들을 옮겨 놓은 화폭은 하나 같이 강렬한 원색너머로 삶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작가가 유독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이 변한다는 카리브해의 물빛에 주목한 ‘카리브’연작이다.“옥색이었다가 또 어느새 비취색이었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카리브의 물빛은 신(神)의 색”이라는 작가에게선 새삼 흥분이 느껴진다. 종군기자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치열하게 관찰하고 다녔다. 행여나 현장의 감상을 잊어 버릴까봐, 카메라는 물론이고 볼펜, 붓펜을 챙겨 다니며 스케치북에 옮겨 놓는 게 일이었다.
기왕에 길을 화두로 꺼냈으니 작가는 또 얼추 10년은 길 위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게 틀림없다. 구도(求道)의 삶을 고민한 ‘바보 예수’연작이 그랬고, 물고기와 새와 말을 내세워 상생(相生)을 말했던 ‘생명의 노래’연작이 그랬다. 작가는 “한 20년 우리 문화예술을 뒤지고 다녔으니 이젠 바깥을 돌아보고 싶다.”며 “지구촌 여러 여행지의 추억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업은 최소한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웃는다.
“체 게바라의 전기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봤어요. 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길 위에 서있는 동안 내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라는.”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 작가는 길 아래로 내려서지 않을 것 같다. 머지않아 인도, 네팔, 티베트 쪽으로도 발길을 돌려볼 생각이다.26일까지.(02)734-6111.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8-03-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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