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03)에는 ‘謹獨’(삼갈 근/홀로 독)이 나오는데,‘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뜻이니,愼獨(신독)과 같은 말이다.
愼獨은 ‘大學(대학)’의 “이른바 성의(誠意)라는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故君子 必愼其獨也).”고 한 것과 ‘中庸(중용)’의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謹’자는 원래 ‘삼가다.’라는 뜻을 나타냈으며 用例(용례)로는 ‘謹嚴(근엄:점잖고 엄숙함),謹賀(근하:삼가 축하함) 따위를 들 수 있겠다.
‘獨’자는 意符인 ‘ (=犬)’과 머리가 크고 몸체가 둥글게 말린 벌레의 형상인 ‘蜀’(나라 이름 촉)이 音符로 쓰인 形聲字(형성자)이다.‘獨’의 본래 뜻이 ‘외롭다.’인 데 대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獨居(독거:혼자 삶),獨裁(독재:특정인이나 집단이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을 차지하여 독단으로 일을 처리함)’등에 쓰인다.
옛 선인들 중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行動擧止(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자기의 言動(언동)을 보고 듣는 이가 없더라도 법도를 지킨 사람이 많았다. 혼자 숨어서 한 일이라고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하나 마침내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각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南冥(남명) 曺植(조식)은 평소 惺惺子(성성자)라는 방울과 敬義劍(경의검)을 지니고 있었다.修養(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果斷性(과단성) 있는 실천을 이룩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특히 성성자에는 ‘雷’(뇌)와 ‘天’(천)자를 새겨 항상 克己(극기)와 省察(성찰)의 도구로 삼았다.
조선시대 平壤(평양)에 사는 이 아무개 진사가 우연히 한양에 왔다가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어찌 弔問(조문)을 마다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가십니까?”“온 김에 弔問을 하면 이는 일을 兼(겸)하는 것이니 亡者(망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요.” 결국 이진사는 평양에서부터 다시 한양에 당도하여 조문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고을의 선비가 친구를 弔喪하는데 홑이불 위 아래로 屍身(시신)이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민망하여 殯所(빈소)를 지키고 있는 未亡人(미망인)에게 提案(제안)하였다.“홑이불을 대각선으로 덮는다면 충분히 시신을 감쌀 수 있겠네요.”“반듯한 삶을 살다간 남편을 삐딱하게 덮을 수는 없지요.” 未亡人의 대답에 친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먼지와 티끌이 뱃속에서 나는 거라면 주저없이 배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겠노라.’고 읊은 南冥의 옹골찬 기상, 평생 귓속말을 멀리한 栗谷의 公明正大(공명정대)한 태도….目前(목전)의 便益(편익)을 마다하고 正道(정도)를 固執(고집)하는 선비의 우직함이 무척 아쉽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愼獨은 ‘大學(대학)’의 “이른바 성의(誠意)라는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故君子 必愼其獨也).”고 한 것과 ‘中庸(중용)’의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謹’자는 원래 ‘삼가다.’라는 뜻을 나타냈으며 用例(용례)로는 ‘謹嚴(근엄:점잖고 엄숙함),謹賀(근하:삼가 축하함) 따위를 들 수 있겠다.
‘獨’자는 意符인 ‘ (=犬)’과 머리가 크고 몸체가 둥글게 말린 벌레의 형상인 ‘蜀’(나라 이름 촉)이 音符로 쓰인 形聲字(형성자)이다.‘獨’의 본래 뜻이 ‘외롭다.’인 데 대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獨居(독거:혼자 삶),獨裁(독재:특정인이나 집단이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을 차지하여 독단으로 일을 처리함)’등에 쓰인다.
옛 선인들 중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行動擧止(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자기의 言動(언동)을 보고 듣는 이가 없더라도 법도를 지킨 사람이 많았다. 혼자 숨어서 한 일이라고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하나 마침내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각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南冥(남명) 曺植(조식)은 평소 惺惺子(성성자)라는 방울과 敬義劍(경의검)을 지니고 있었다.修養(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果斷性(과단성) 있는 실천을 이룩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특히 성성자에는 ‘雷’(뇌)와 ‘天’(천)자를 새겨 항상 克己(극기)와 省察(성찰)의 도구로 삼았다.
조선시대 平壤(평양)에 사는 이 아무개 진사가 우연히 한양에 왔다가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어찌 弔問(조문)을 마다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가십니까?”“온 김에 弔問을 하면 이는 일을 兼(겸)하는 것이니 亡者(망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요.” 결국 이진사는 평양에서부터 다시 한양에 당도하여 조문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고을의 선비가 친구를 弔喪하는데 홑이불 위 아래로 屍身(시신)이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민망하여 殯所(빈소)를 지키고 있는 未亡人(미망인)에게 提案(제안)하였다.“홑이불을 대각선으로 덮는다면 충분히 시신을 감쌀 수 있겠네요.”“반듯한 삶을 살다간 남편을 삐딱하게 덮을 수는 없지요.” 未亡人의 대답에 친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먼지와 티끌이 뱃속에서 나는 거라면 주저없이 배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겠노라.’고 읊은 南冥의 옹골찬 기상, 평생 귓속말을 멀리한 栗谷의 公明正大(공명정대)한 태도….目前(목전)의 便益(편익)을 마다하고 正道(정도)를 固執(고집)하는 선비의 우직함이 무척 아쉽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2006-01-0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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