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공지영(41)이 돌아왔다.‘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이후 장편소설로는 꼭 5년만이다.“오랫동안 칼을 놓았다가 어쩔 수 없이 수술실로 들어선 의사처럼 두려운 마음이었다.”고 했다.“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것은 글쓰기뿐”이었음을 알게 됐고, 소설 쓰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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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쓰는일'과 `사는일'을 갈라놓을… “인생에서 `쓰는일'과 `사는일'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작가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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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쓰는일'과 `사는일'을 갈라놓을…
“인생에서 `쓰는일'과 `사는일'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작가 공지영.
새 장편 ‘별들의 들판’(창비 펴냄)은 소설로 풀어쓴 ‘베를린 일기’다.2년 전 안식년 삼아 1년여를 지낸 베를린의 교민사회에서 낯설고도 다양한 사연들을 만났고, 그들을 놓치지 않고 글감으로 복원해냈다.
중·단편 6편의 연작소설집은 후일담 성격이 그래서 짙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특정인의 실화와 무관하게 주변 이야기들에서 모티브만 빌려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386세대 작가로서 고민의 끈을 부여잡고 애면글면했던 흔적을 들키고 만다.
작중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적 선택의 문제였든 시대의 질곡에 휘둘린 결과였든, 지난 세월에 긁힌 상처를 숙명처럼 떠안고 현재를 살아낸다는 점에서다. 이념의 가치가 표백돼버린 상실의 시대에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는 인물들에게 작가의 뜨거운 연민이 가닿는다.
‘네게 강 같은 평화’의 최영명이란 이름의 사내는 지독한 자기환멸을 남몰래 감당하느라 휘청댄다. 해외취재를 핑계삼아 찾아간 베를린에서 그는 임수경 방북에 연루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촌형 수명을 만난다. 오십줄을 바라보며 남루하게 늙어가는 형, 잘 나가는 보수 신문사의 기자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듯하나 몰래 만나는 여자 문제로 위선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는 사내. 전혀 다른 캐릭터 같으나,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고뇌한다는 지점에서 번번이 닮은꼴로 포개진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가난한 독일 유학생의 아내 서영이 풀어가는 ‘섬’, 광주항쟁을 세상에 알렸던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가 등장하는 ‘귓가에 남은 음성’ 등을 빌려 작가는 시대적 증언을 담는 소설의 기능을 환기시킨다.
생래적 연민을 품고 등장인물들을 멀찍이 조망하는 듯한 화법은 화려한 은유 없이도 가슴을 싸하게 만드는 신통력이 있다.“십년 전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했던 진실이 이제는 지루해진다. 사명은 팔자가 되어버리고 운명은 개그로 바뀌어버린다.”(‘네게 강 같은 평화’)고 주인공은 탄식한다. 힌츠페터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또 주인공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처럼 쓰라리고 서러웠다.”(‘귓가에 남은 음성’)고 통렬한 고백을 날린다.
여성작가로서 물끄러미 발 아래 좌표를 들여다본 모성적 글쓰기도 잊지 않았다. 폭력에 못이겨 이혼한 전 남편을 10년만에 만나 아이를 되찾으려는 여자(‘빈 들의 속삭임’), 아버지를 여읜 뒤 실연의 상처까지 안고 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 나연을 만나러 베를린을 찾은 또 다른 여자(‘별들의 들판’)가 여성 정체성을 실존적으로 발언하는 인물들이다. 행간의 체온이 갈수록 더해질 수밖에. 작가는 열일곱살짜리 딸을 둔, 두 아이의 엄마인 것을.
나른한 수사나 출렁대는 자의식 없이 ‘통속’을 가장한 직설화법에 대해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그의 소설만큼 시류 변화를 예민하게 읽어내면서도 속된 변화를 거절하는 절조를 보여주는 세계도 드물다.”고 평했다.
“사형수에 관한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라고 작가는 말했다.9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4-10-2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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