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년부터 1295년까지 원나라에서 관직을 맡았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원나라의 늙은 신하들이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볼록렌즈 안경을 끼고 있다고 썼다. 중국이 안경 발명국이라는 주장의 근거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문들은 안경이 1280년경 베니스의 유리공들에 의해 최초로 제작됐고 수도승들에 의해 중국 원나라까지 전해졌다고 본다.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즉 16세기 말로 추정한다. 안경알은 유리가 아닌 수정을 갈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1600년대 초부터는 경주에서 안경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렌즈가 마치 ‘게눈’처럼 생겨서 체신이 안 선다는 이유로 초창기에 안경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18세기 들어 실용성을 중시하는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안경이 보편화되면서 안경은 선비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말년의 정조도 안경을 착용했을 정도였다.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는 정조 23년(1799년) 7월에 안경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안경 다리를 비단실로 만들고 테는 옥으로 된 옥안경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나이는 당시 47세였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정조를 도와 개혁을 주도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는다. 포항 장기에서 1차 유배생활을 마치고 47세에 강진의 귤동에 있는 초가에서 다시 유배생활을 했다. 정약용이 10년 동안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이 다산초당이다.
전남 강진군이 다산초당에 설치할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김호석 교수가 치밀한 고증을 거쳐 완성한 새 초상화에서 다산은 안경을 끼고 있다.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약화됐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최고의 르네상스형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이 근엄함을 벗어던진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안경을 쓴 모습이 눈에 익으려면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볼록하게 튀어나온 렌즈가 마치 ‘게눈’처럼 생겨서 체신이 안 선다는 이유로 초창기에 안경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18세기 들어 실용성을 중시하는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안경이 보편화되면서 안경은 선비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말년의 정조도 안경을 착용했을 정도였다.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는 정조 23년(1799년) 7월에 안경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안경 다리를 비단실로 만들고 테는 옥으로 된 옥안경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나이는 당시 47세였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정조를 도와 개혁을 주도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는다. 포항 장기에서 1차 유배생활을 마치고 47세에 강진의 귤동에 있는 초가에서 다시 유배생활을 했다. 정약용이 10년 동안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이 다산초당이다.
전남 강진군이 다산초당에 설치할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김호석 교수가 치밀한 고증을 거쳐 완성한 새 초상화에서 다산은 안경을 끼고 있다.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약화됐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최고의 르네상스형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이 근엄함을 벗어던진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안경을 쓴 모습이 눈에 익으려면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2009-04-20 3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