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엽의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그린 대하소설 ‘대망(大望)’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의 미묘함을 일깨워 주는 소설이다. 소설 전편 중에서도 오카자키라는 조그만 성의 성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중세의 일본을 통일하는 기반을 닦는 전반부가 훨씬 재미있다. 거기에는 일신의 안위나 가족의 평안보다는 오직 인종과 검약으로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던지는 오카자키당 가신(家臣)들의 충성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그만 차이가 결국엔 일본은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유신으로, 한국은 구한말의 매국관료로 이어져, 지금의 한·일간 경제력 격차를 낳은 원인(遠因)이 되지 않았나 싶지만….
이미지 확대
이성열 대한지적공사 사장
닫기이미지 확대 보기
이성열 대한지적공사 사장
국가의 근간이자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가신은 바로 90만 관료다. 이들은 국가의 정책을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수립하고, 행정부 주군인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정책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좋은 정책형성을 위해 정치인은 정책질의를 통해, 언론인은 신문비평을 통해, 학자들은 이론제공을 통해 나름대로 기여한다. 정책의 연혁과 집행수단 그리고 그 부작용까지 세심히 살펴서 비록 당장은 인기 없는 정책일지라도, 비록 당장은 소수의 국민들만 위하는 정책으로 보일지라도,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 꼭 시행해야 할 정책이면 고집스럽게 추진해야 할 임무는 궁극적으로 직업 관료들에게 있다.
그런데 관료들의 사기(士氣)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들이 있어 걱정스럽다. 더구나 공무원들이 개혁의 걸림돌이 된다는 일부 여당 의원들의 질책이 실린 기사를 읽을 때엔 꼭 10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뒤 새로이 여당이 된 의원들로부터 관료들이 구 여당인 한나라당과 결탁돼 있다고 야단맞던 시절의 당혹스러움이 기억난다. 단언컨대 필자도 공무원 시절 내가 찍지 않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한 번도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거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현직에 있는 직업 관료들도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구현코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출한 행정부의 수반이고 90만 관료들의 주군이기 때문이다. 흔히 공무원은 사기를 먹고 산다고 한다. 박봉이지만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무장시켜야 할 관료들의 사기가 더이상 떨어져서는 곤란하다. 진정으로 걱정되는 것은 5년마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정권 교체 때마다 어렵게 양성해 온 관료사회가 필요 이상으로 흔들릴 가능성이다. 선배들의 모습에서 5년 뒤의 자기모습을 유추해 본 후배들이 정권 주기에 맞춰 자신의 공직 커리어를 설계하려 든다고 해보자. 예컨대 집권 후반기가 가까워지면 가장 우수한 관료들이 근무해야 할 청와대 파견을 기피하거나 새로운 정부에서 정리대상으로 분류될 것을 우려해 1급으로의 승진을 양보하려 들기 시작하면 그 부작용과 사회적 비용은 공직사회로만 그치지 않는다.
‘공직자가 위기극복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직업 관료를 우선 춤추는 고래로 만들어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첫째도 가신, 둘째도 가신” 하면서 자신의 신하를 항상 믿고 의지했듯이 정부와 여당은 관료들의 자긍심과 보람을 제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관료들이 경제위기 극복전의 제일번 창을 용감히 내지르지 않겠는가.
이성열 대한지적공사 사장
2009-01-19 3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