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고 한다. 연초에 온스당 400달러대였던 금값이 지금은 800달러대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금이 귀한 시대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골드펀드를 관리하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회가 불안하면 금값은 꾸준히 상승하는 국면에 이르는데 지금이 그러한 시기여서 금값 상승은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한다.
골드러시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영화화한 것이 미국 서부영화이다.
서부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은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든다. 금광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 법과 도덕은 미치지 않고 갱단은 무소불위의 착취와 살인을 행한다.
그리고 접근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골드러시의 결말이라 할 수 있는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는 황금광을 찾아 무작정 알래스카로 온 주인공이 황금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잃어버린 채 추위와 굶주림의 처참한 지경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골드러시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미국의 공황으로 1930년대 일제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그 여파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금광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너도 나도 자신의 일자리를 박차고 금을 찾아 다녔다.
이는 일반서민뿐만 아니라 부자나 지식인, 언론인, 관료 할 것 없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 채만식의 ‘황금광시대’‘금의 정열’ 등은 모두 일확천금을 찾아 터무니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사실 이들 작품들은 당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들이 직접 금광을 찾아 헤맨 실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골드러시의 원인은 사회가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삶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오직 돈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데에서 비롯한다.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고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민중은 생의 푯대를 상실하고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된다. 그때 믿을 것은 오직 물질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골드러시 속에서는 서민만 희생을 당한다. 자세한 정보도 없이 세태에 휩쓸려 결국 늘 막차를 타거나 잘못된 투자를 하기 일쑤이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 한 대목을 보면 금을 캔다고 멀쩡한 콩밭을 헤집어서 잘된 콩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지(賭地)도 못 내게 된다. 그 한 대목을 보자.
“밭에 구멍을 셋이나 뚫었다. 그리고 대고 뚫는 길이었다. 금인가 난장을 맞을 건가 그것 때문에 농군은 버렸다. 이게 필연코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이리라. 그 소중한 밭에다 구멍을 뚫고 이 지랄이니 그놈이 온전할 건가.”
물질적 욕망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애꿎은 서민만 낭패를 당한다. 이러한 시기에 정부는 부정부패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법은 올바로 서지 못하며 지식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나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이나 지도자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금맥을 찾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민들은 콩밭이나 망치면서 결국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라. 대통령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 퇴임 후 제 사저나 꾸미고 있고 정치가나 판검사, 심지어 사회단체들까지 유력 재벌로부터 떡값을 정기적으로 받아 왔다고 한다. 이런 세태 때문일까. 요즘 어른들은 자신의 집값이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이고, 아이들은 쇠침으로 고양이 눈 맞히기, 아파트 옥상에서 병아리 날리기 놀이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금값이여, 언제 떨어질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전기철 숭의여대 교수 미디어창작학과·시인
그만큼 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골드펀드를 관리하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회가 불안하면 금값은 꾸준히 상승하는 국면에 이르는데 지금이 그러한 시기여서 금값 상승은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한다.
골드러시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영화화한 것이 미국 서부영화이다.
서부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은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든다. 금광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 법과 도덕은 미치지 않고 갱단은 무소불위의 착취와 살인을 행한다.
그리고 접근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골드러시의 결말이라 할 수 있는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는 황금광을 찾아 무작정 알래스카로 온 주인공이 황금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잃어버린 채 추위와 굶주림의 처참한 지경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골드러시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미국의 공황으로 1930년대 일제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그 여파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금광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너도 나도 자신의 일자리를 박차고 금을 찾아 다녔다.
이는 일반서민뿐만 아니라 부자나 지식인, 언론인, 관료 할 것 없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 채만식의 ‘황금광시대’‘금의 정열’ 등은 모두 일확천금을 찾아 터무니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사실 이들 작품들은 당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들이 직접 금광을 찾아 헤맨 실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골드러시의 원인은 사회가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삶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오직 돈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데에서 비롯한다.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고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민중은 생의 푯대를 상실하고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된다. 그때 믿을 것은 오직 물질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골드러시 속에서는 서민만 희생을 당한다. 자세한 정보도 없이 세태에 휩쓸려 결국 늘 막차를 타거나 잘못된 투자를 하기 일쑤이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 한 대목을 보면 금을 캔다고 멀쩡한 콩밭을 헤집어서 잘된 콩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지(賭地)도 못 내게 된다. 그 한 대목을 보자.
“밭에 구멍을 셋이나 뚫었다. 그리고 대고 뚫는 길이었다. 금인가 난장을 맞을 건가 그것 때문에 농군은 버렸다. 이게 필연코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이리라. 그 소중한 밭에다 구멍을 뚫고 이 지랄이니 그놈이 온전할 건가.”
물질적 욕망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애꿎은 서민만 낭패를 당한다. 이러한 시기에 정부는 부정부패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법은 올바로 서지 못하며 지식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나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이나 지도자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금맥을 찾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민들은 콩밭이나 망치면서 결국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라. 대통령은 막대한 세금을 들여 퇴임 후 제 사저나 꾸미고 있고 정치가나 판검사, 심지어 사회단체들까지 유력 재벌로부터 떡값을 정기적으로 받아 왔다고 한다. 이런 세태 때문일까. 요즘 어른들은 자신의 집값이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이고, 아이들은 쇠침으로 고양이 눈 맞히기, 아파트 옥상에서 병아리 날리기 놀이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금값이여, 언제 떨어질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전기철 숭의여대 교수 미디어창작학과·시인
2007-12-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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