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학문엔 행운아도 영웅도 없다/황규호 문화칼럼니스트

[시론] 학문엔 행운아도 영웅도 없다/황규호 문화칼럼니스트

입력 2004-02-18 00:00
수정 2004-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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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쪽 끄트머리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와 인덕면 사계리 일대서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최근 온갖 매체를 다 탔다.‘세계의 기둥’이라는 육중한 코끼리와 날래게 뛰는 말,강중거렸을 새 발자국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흥미를 한껏 돋우었다.

문화재청에서 발표한 조사 내용에 따르면,발자국 화석이 보이는 퇴적층은 후기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하는 약 5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물 속에서 활동한 화산이 뿜어낸 화산재가 응회암(凝灰岩)으로 채 굳기도 전에 밟고 지나가면서 찍힌 발자국이라는 설명이다.주인공은 오늘의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진화하기 이전 단계의 고인류 호모 사피엔스로 보았다.코끼리 같은 열대성 동물이 발자국을 남긴 것을 보면,당시 한반도의 기후환경은 따뜻했던 모양이다.후기 플라이스토세를 흔히 빙하시대라고 하지만,몇 차례 따뜻한 기후가 있었다고 한다.

제주 발자국 화석 발견은 국내 지질학계의 한 층서학(層序學) 전공학자가 거둔 대단한 수확인지도 모른다.인류의 기원을 ‘남방 원숭이’라는 뜻을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따지면,300만년이 넘는다.그렇듯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마치 카메라의 스냅샷처럼 순간에 찍힌 발자국을 찾아냈다는 것은 행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은 행운만을 믿고 성취할 수는 없다.이번에 문화재청을 통해 공표한 내용에서는 학문의 지식이나 정보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단박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코끼리 뼈화석이 북한 구석기 유적에서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제주 코끼리 발자국 화석을 남한 최초의 자료로 부각시킨 것이나,말발굽 자국 화석에서 제주 말의 원형을 추정한 것 등이 그것이다.지난 1979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석회암 동굴 구석기 유적에서 코끼리 상아를 발굴한 일이 있다.또한 이미 북한 학계가 이른바 ‘상원말’로 명명한 말 뼈화석이 평양 근교 상원군 검은모루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학문은 모름지기 무르익어야 원숙한 경지에 든다.초조하게 당장 성과를 기대하는 학문 연구는 금물일 수도 있다.1976년 메리 리키가 레이톨리 응회암 지대서 고인류 발자국 화석을 찾아낸 것도 생애를 거의 올두바이 계곡만을 맴돌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메리는 1978년 들어 또 다른 사람 발자국 화석과 유명한 응갈로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머리뼈를 발견하기에 이른다.레이톨리 사람 발자국 화석 발견은 고인류가 약 360만년 전에 이미 곧게 서서 걸었다는 직립보행(直立步行)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올해 정초 지중해연안 니스의 라자레 구석기 동굴 유적을 들렀을 때 느꼈던 소회(所懷)가 새삼스럽다.한 동굴 유적을 꼭 40년째 발굴 중이라고 했다.그것도 한 해에 바닥을 2.5㎝ 이상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고고학을 전공분야에 따라 잘게 나누고,인접학문인 지질학·고동물학·고환경생물학 등을 전공한 학자들도 발굴조사와 연구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선진학문 풍토를 보았다.

어떻든 발자국 화석 조사활동을 결산하는 자리에 구석기 고고학이 배제되었다.화석 퇴적층 형성기인 제4기(紀)와 후기 플라이스토세가 구석기시대와 맞물려 있음에도 그랬다.그런데 문제는 바로 발표 다음날 지질학계에서 일어났다.한쪽에서 발표내용을 뒤집고 나선 것이다.고발성격이 강한 반론제기는 학문의 정도(正道)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씁쓸했다.학문에는 행운아도,그렇다고 영웅도 없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황규호 문화칼럼니스트˝
2004-02-18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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