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파주’ 보일듯 말듯한 사랑·진실, 안개 자욱한 파주와 닮아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파주’ 보일듯 말듯한 사랑·진실, 안개 자욱한 파주와 닮아

입력 2009-10-30 12:00
수정 2009-10-30 12: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7년 전, 신학대생 중식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첫사랑 선배 집에서 지냈다. 그녀와 관계를 나누다 돌이키기 힘든 사고를 저지른 그는 파주로 떠난다. 목회활동을 펼치는 선배의 교회에서 야학을 꾸리는 한편, 중식은 그곳에서 두 명의 여자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7년 전 어느 날, 은모 앞에 중식이 나타났다. 그와 언니가 결혼한 후, 언니에 대한 애정과 중식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반항기의 소녀는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다. 시간이 흘러 2003년. 만남과 헤어짐 뒤에 중식과 은모는 다시 마주하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각기 다른 진실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은 관계의 실체에 접근하려 바동댄다.

‘파주’는 종종 안개에 싸여 앞뒤를 분간하기 힘든 파주의 풍경처럼 신비한 영화다. 시간을 오가며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관객은 둘 혹은 서넛의 감정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데, 갇힌 인물의 속내를 파고든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파주’를 단순하게 읽는 것도 가능하다. ‘파주’는 불륜의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다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두 사람의 멜로드라마 곁으로 사회드라마를 슬쩍 더한 작품이다. 그렇게 읽어낸 관객에겐 ‘파주’가 괜히 시간과 사건을 비비꼬아 지적인 채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평가 또한 결과적으로 영화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데 일조할 따름이며, ‘파주’는 진실을 바라보려하면 할수록 정체를 숨기는 아슬아슬한 미스터리로 완성된다.

‘파주’는 ‘어쩔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할까’라고 질문하기 전에,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는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그것이 ‘파주’를 접근하기 힘든 작품으로 만든다). 영화의 중심에 선 남자와 여자는 미약함으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낳는다. 중식은 선과 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부단하게 노력하지만, 한 개체로서 줄곧 어긋난 관계를 형성하는 그는 안팎의 부조화 때문에 고통에 시달린다. 누군가의 보살핌에 굶주린 은모는 현실이 보호막을 박탈할 때마다 도피에 빠진다. 홀로 서지 못하는 존재인 그녀에게 세상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다. ‘파주’는 중식을 고통 받게 만들고, 은모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실체를 파주라는 도시에서 찾는다.

소설가 김연수는 단편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외국인의 말임을 밝히며) ‘서울은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라고 썼다. 비단 서울뿐이랴, 한국의 모든 도시는 과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도시는 자신의 뿌리와 본질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것 같다. 오로지 미래의 번영만이 의미를 지닌 한국이다 보니, 다가올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불안감은 나날이 증폭되기만 한다. 파주는 지금 변화의 핵심에 놓인 공간이지만, 인간이 서로 나눌 가치가 파주의 현재형에는 없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중식과 은모는, 자신의 삶과 온전히 관계하지 못하는 수많은 한국인의 이름이며, ‘파주’는 뿌리를 잃은, 그래서 불안에 기거하는 존재를 다독이는 위안의 노래다.

감독 박찬옥, 개봉 28일.

<영화평론가>
2009-10-30 2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탈모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1. 건강보험 적용이 돼야한다.
2. 건강보험 적용을 해선 안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