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2일 관객과 만나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신작 ‘파라노이드 파크’는 ‘말라노체’,‘엘리펀트’에 이은 청소년 3부작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엘리펀트’를 가득 채웠던 노란색 은행 잎의 시각적 이미지가 스케이트 보드의 마찰음으로 바뀌었을 뿐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내면에 귀기울이는 소년이 등장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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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바라는 것은 다만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는 것뿐인 소년이 있다. 별거 중인 부모 밑의 알렉스에게 꿈도 미래도 모두 스케이트 보드에 달려 있다.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 아니 남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만큼 멋지게 타서 ‘파라노이드 파크’를 휘어잡는 것, 그것이 바로 알렉스의 꿈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소망 혹은 욕망은 없다. 그의 하루 하루는 스케이트 보드에서 시작해 거기서 맺음된다.
문제는 스케이트 보드밖에 없는 이 소년에게 심각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스케이트 보드 공원인 파라노이드 파크 주변을 맴돌던 알렉스는 어느 날 우연히 어떤 무리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제안한다.“기차를 타보고 싶지 않으냐고, 그것도 몰래.” 알렉스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대신 기차를 타기 위해 간다. 순간의 선택으로 알렉스의 삶은 달라진다. 그런데 사건이 점점 심각해진다. 기차를 탄다는 것이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편적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던 알렉스는 너무도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우발적으로 사고에 연루됐다는 편이 옳다. 기차를 타는 그를 저지하던 경비원을 밀친다는 것이 허리가 잘려 나가는 끔찍한 사고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번뿐인 인생은 우발적 사고에 관대하지 않다. 영화는 다시 찍을 수 있고 기억은 조작될 수 있지만 사고는 사고 그대로 남게 된다. 그것이 타인들에게는 묻혀질지언정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그 사실이 달라질 수는 없다.
영화는 내내 이 소년이 우연하지만 심각한 사고를 자신의 삶에 편입시키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소년은 이 전회적 사건을 두고 고민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알렉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고백함으로써 그 우연한 사건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고백이 어른이나 성직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이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자신이 썼던 기록을 불태우는 장면은 감독이 생각하는 성장의 의미를 짐작케 한다. 이렇게 알렉스는 자신의 삶에 침범한 우연성을 통제하며 그 우연에 인과관계를 주는 데 성공한다.
슬로 모션으로 재현된 알렉스의 샤워 장면은 감각으로 내면을 뒤집는 향연을 절감케 한다. 귓바퀴로 떨어지는 물방울 모양과 음악, 그리고 소년의 몸과 함께 고통은 감각이 되어 넘쳐난다. 구스 반 산트의 체온이 영화 깊숙이 배어들어 알렉스의 시선과 일치하는 순간이다.8㎜의 역동과 32㎜의 섬세함을 혼용해 찍어낸 크리스토퍼 도일의 유려한 화면들은 이런 심리를 극대화해 준다. 성장은 그렇게 멀미나는 이동이다.
영화평론가
2007-11-1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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