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은인을 찾았습니다.37년전 부모님이 빚진 돈을 드디어 갚게 돼 정말 기쁩니다.”
중국 대륙에 한 60대 남성이 빚진 돈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은인을 찾아낸 뒤 마침내 빚을 갚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염량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다.
미담의 주인공은 중국 중남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에 살고 있는 위정인(于正印)씨.그는 한 회사 동료로부터 부모의 병원비를 빌렸으나 서로 헤어지는 바람에 갚지 못하다가 37년만에 은인을 다시 찾아내 빚을 갚아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다고 장사만보(長沙晩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미담의 사연은 이렇다.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 대륙을 휩쓸던 지난 1969년 1월,지식분자이면서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낙인 찍혀 하방(下放)된 위씨는 같은 이유로 하방된 장바오싱(張寶星)씨를 후난성 이양(益陽)시 위안장(沅江)현 신화(新華)공사에서 만났다.
이들은 처지가 비슷해 만나자마자 곧바로 친해졌다.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10개월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위씨는 그대로 머물러 있은 반면 장씨는 주저우(株洲)야금공장으로 근무지가 바뀌어 헤어지게 된 때문이다.
그러던중 1970년 초 춘제(春節·설날)을 전후해 위씨의 어머니가 폐병을 심하게 앓았다.애옥살이 형편이라 어머니의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주변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갔으나 다 어려운 처지라 돈을 빌릴 방법이 없었다.
위씨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주저우의 야금공장으로 찾아가 장씨를 만났다.그의 급박한 사정 얘기를 들은 장씨는 자신의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23위안(약 2760원)을 선뜻 내주었다.이 덕분에 위씨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물론 어머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증이 워낙 중해 끝내 사망했으나 장씨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어렵던 시절이 지나고 기계공장 간부로 일하며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찾은 지난 2003년,위씨는 옛날의 은인을 찾아 빚을 갚기로 작정했다.이때부터 장씨의 고향 등으로 수소문해봤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던중 최근 장사만보(長沙晩報) 등 언론기관을 통해 장씨를 찾는데 성공,37년전의 빚을 갚게 된 것이다.지난 9일 장씨를 만난 위씨는 “정말 감사합니다.벌써 37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네요.그 어렵던 시절 그 큰돈을 선뜻 내어주신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에 장씨는 “당시에는 모두 어렵던 시절이어서 힘들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다.”며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중국 대륙에 한 60대 남성이 빚진 돈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은인을 찾아낸 뒤 마침내 빚을 갚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염량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다.
미담의 주인공은 중국 중남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에 살고 있는 위정인(于正印)씨.그는 한 회사 동료로부터 부모의 병원비를 빌렸으나 서로 헤어지는 바람에 갚지 못하다가 37년만에 은인을 다시 찾아내 빚을 갚아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다고 장사만보(長沙晩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미담의 사연은 이렇다.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 대륙을 휩쓸던 지난 1969년 1월,지식분자이면서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낙인 찍혀 하방(下放)된 위씨는 같은 이유로 하방된 장바오싱(張寶星)씨를 후난성 이양(益陽)시 위안장(沅江)현 신화(新華)공사에서 만났다.
이들은 처지가 비슷해 만나자마자 곧바로 친해졌다.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10개월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위씨는 그대로 머물러 있은 반면 장씨는 주저우(株洲)야금공장으로 근무지가 바뀌어 헤어지게 된 때문이다.
그러던중 1970년 초 춘제(春節·설날)을 전후해 위씨의 어머니가 폐병을 심하게 앓았다.애옥살이 형편이라 어머니의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주변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갔으나 다 어려운 처지라 돈을 빌릴 방법이 없었다.
위씨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주저우의 야금공장으로 찾아가 장씨를 만났다.그의 급박한 사정 얘기를 들은 장씨는 자신의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23위안(약 2760원)을 선뜻 내주었다.이 덕분에 위씨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물론 어머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증이 워낙 중해 끝내 사망했으나 장씨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어렵던 시절이 지나고 기계공장 간부로 일하며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찾은 지난 2003년,위씨는 옛날의 은인을 찾아 빚을 갚기로 작정했다.이때부터 장씨의 고향 등으로 수소문해봤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던중 최근 장사만보(長沙晩報) 등 언론기관을 통해 장씨를 찾는데 성공,37년전의 빚을 갚게 된 것이다.지난 9일 장씨를 만난 위씨는 “정말 감사합니다.벌써 37년이 지났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네요.그 어렵던 시절 그 큰돈을 선뜻 내어주신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에 장씨는 “당시에는 모두 어렵던 시절이어서 힘들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다.”며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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