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장 김홍남
글 고은별 자유기고가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경이었다. 그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렇게 금방 눈에 띄는 차가운 질감의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을 쓴 여성은 내 기억에 김홍남 관장이 처음이다. 여자라고 사리는 것이 없었고 자신을 드러내기에 두려움이 없었기에 운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전통과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사람. 홍남(紅男)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김 관장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일까? 박물관이 문을 연 지 61년 만에 남성들이 우월적 지위를 누려온 이 분야에서 김 관장이 여성 최초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것은 문화계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은별 | 우선 꿈을 이루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김홍남 | 감사합니다.
고은별 | 지난 4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평화 포럼에서 만난 후 몇 개월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어요.
김홍남 | 그렇지요. 그 동안 제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인사라는 것이 되어 봐야 아는 것이고 뚜껑이 열려 봐야 아는 것이잖아요. 정상적으로 그날 하루의 일과를 지내고 있었는데 전임 관장님께서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은별 | 이름이 붉은 홍(紅) 자에 사내 남(男) 자 세요.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인가요?
김홍남 | 딸이 위에 셋이다 보니까 아들을 낳으라고 지어 주셨어요. 우리 집과 친하게 지내던 한의사 한 분이 지어 주셨는데 평범한 여성으로 키우려면 초등학교 지나서 이름을 바꿔주라고 하셨지요. 어머니께서는 호적의 이름은 바꾸지 않고 저를 애칭으로 남이라고 부르셨어요.
고은별 | 어머니의 교육열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홍남 | 다섯 형제 중에서 어머니하고 제가 가장 가깝지 않았나 생각해요. 우리 형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요. 어머니께서 저를 아주 특별하게 사랑해 주셨지요. 호흡기 장애로 돌아가셨는데 2개월 내지 3개월 정도 무의식 상태였어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제가 어머니를 안아드리면서 귀에다가 “엄마 나 누구야?”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어머니 입이 움직이면서 ‘김 홍 남’ 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은별 | 어머니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김홍남 |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몇 개월 동안 말 한마디 못하시고 무의식 상태였는데 제 이름 석 자를 말씀하신 거예요. 한 달 후에 돌아가셨지요.
고은별 | 보스다운 면모가 많으시다고요?
김홍남 | 보스답다기보다 독단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것을 좋은 의미로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바꿔서 말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독단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리더가 되려면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우선 앞서 가야 하지요.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인데, 앞서 보지 않고 어떻게 리더가 되겠습니까? 문화에서 비전이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서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앞서 있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들다는 표현이 되기도 하지요. 선견지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옳은 것이 있고 따라오라 하면 독단이라고 합니다. 저는 전력투구하는 타입입니다. 앞이 보이는데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몰고 가거나 의도를 곡해할 때 참 안타깝고 외롭습니다.
고은별 |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김홍남 | 저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이에요. 긍정적인 사람이지요. 묻어두지는 않고 그냥 잊어버립니다.
고은별 | 에코 피스 리더십(Eco-Peace Leadership) 명예이사로도 활동 중이시죠?
김홍남 | 유네스코와 관련이 있는 단체입니다. ‘평화는 자연 사랑과 함께’라는 취지를 갖고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자연 속에서 자연 사랑과 평화 사랑을 체득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고은별 | 북촌포럼은 어떤 모임인가요?
김홍남 | 경복궁에서 창덕궁 사이가 북촌이지요. 본래는 가회동의 양반 집들, 궁 집들도 많았어요. 옛날에는 대가집들이 많았지요. 윤보선 전 대통령 집도 있고…. 서울에 마지막 남은 한옥집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임입니다.
고은별 | 박물관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김홍남 | 획기적인 것은 없어요. 우리 국민들이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전시를 통해서 한국 문화의 뿌리와 특성, 예술적 성취 등을 느끼면서 체험하고 한국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도록 해줄 수 있어야겠지요. 꼭 가봐야 하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야지요.
고은별 | 현장 교육을 온 학생들이 많았어요. 문화 교육 기관으로서의 박물관의 역할이라고 할까, 어떤 프로그램들을 구상하고 계신지요.
김홍남 | 지금 참 잘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어린이 박물관도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합니다. 다만 학생 단체 입장수로 일년의 관람객 수를 메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오는 것은 강제 동원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문화 선진국이 되려면 그냥 삼삼오오 찾아와서 수준 높은 관람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 높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지금 선진 박물관에서 전시만큼 중요시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박물관 안에서 성인 교육, 청소년 교육, 장애인 교육 등의 사회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을 담당하는 부도 없고 과도 없습니다. 아마추어 수준이지요. 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할 우수한 인적 자원이 절실합니다.
고은별 | 우리는 지금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예술의 핵심, 문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홍남 |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유산을 현대와 미래의 문화 재창조의 발원지로 쓰는 데서 힘이 나오겠지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어떤 공통부분이 있지만 공통이 아닌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시아의 일부라는 것을 당당히 인정하고 아시아 문화 속에서의 한국 문화가 갖고 있는 특색, 문화의 힘을 키워 나가야만 아시아의 문화도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요. 각자 자기 몫을 다함으로써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문화는 우월하고 어느 나라의 문화는 열등하다는 식의 논리는 옳지 않습니다. 한국 문화만이 최고라고 하는 인식은 자기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게 합니다.
고은별 |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십니까?
김홍남 | 그런 편이지요. 이제 막 육순의 나이에 뭘 그렇게 대단한 로맨스를 하겠어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고은별 | 어릴 적의 꿈이 지금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나요?
김홍남 | 우리 어머니가 원예를 하셨고 항상 무엇인가를 수집하셨어요. 어머니의 안방이 작은 박물관이었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 같았어요. 보스 기질이 있었지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닐 때 사진부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는데 여자로서 처음으로 사진부 부장을 맡았습니다.
고은별 | 내부에 존재하는 여성성에 대해서….
김홍남 | 어릴 때부터 여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못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그렇게 키우지 않으셨어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결혼이 꼭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었지요. 사리는 것이 없었어요.
고은별 | 앞으로의 꿈은?
김홍남 | 이 삶을 잘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자기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위대함을 위대한 실현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 모두 내 안에 위대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 위대한 가치를 그냥 가치로 남겨놓지 말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실천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0분 인터뷰….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김홍남 관장은 절도 있고 명확한 어조로 질문에 답하였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인터뷰가 시작된 지 정확히 삼십 분이 지나자 김 관장은 다른 스케줄 때문에 약속장소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일어섰다. 지난 8월 9일 박물관장에 취임하여 공식 업무를 시작한 김 관장이 얼마나 바쁜 일정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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