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만날 수 있소. 그를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면 올바른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겠소. 내가 듣건대 이지는 묵자라 하였소. 묵자들은 상사(喪事)를 치름에 있어서는 박하게 하는 것으로 정도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 이지도 그것으로 천하의 풍속을 바꾸어 놓으려 할 것이니, 어찌 그 도가 옳지 않다고 해서 그 뜻마저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소. 그런데 이지는 그의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지냈으니, 곧 그것은 자기가 천히 여기는 방법으로 그의 어버이를 섬긴 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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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는 묵자였으나 특이하게도 묵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그의 어버이가 죽었을 때는 장사를 후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점 때문에 맹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지와의 만남을 흔쾌히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벽으로부터 맹자의 말을 전해들은 이지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유자들의 도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옛날사람들이 갓난아이를 돌봐주듯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어야 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의 말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약보적자(若保赤子)’를 가리키고 있다. 적자는 갓난아이를 뜻하는 말로 예부터 나라의 임금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사랑하고 돌본다고 하여서 적자라고 불렀는데, 이지는 유가에서도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면 이는 묵가에서 말하는 ‘백성들을 두루 사랑하고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한다.’는 ‘겸애’와 다름이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묵가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어야 한다.’는 겸애가 유가보다 더 발전된 사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지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지는 맹자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에는 본래 차등이 없으나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서가 어버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뿐 맹자가 주장한 사랑의 단계적 실천론은 본래의 유가학설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지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 말을 서벽으로부터 전해 듣자 맹자는 다시 말하였다.
“이지는 정말로 사람들이 형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람의 아기를 사랑하는 것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 ‘서경’의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곧 갓난아기가 기어가서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며, 그것은 갓난아이의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늘이 만물생성을 한 가지 근본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지는 두가지 근본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맹자의 대답은 자기 조카와 이웃의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없는 비현실성을 근거로 겸애설의 모순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즉 서경에 나오는 ‘약보적자’란 말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기어들어가는 것은 어린아이의 죄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 어른들의 잘못이듯이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은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죄를 짓는 환경을 만드는 정치가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 유가의 말을 인용한 이지의 말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2005-10-1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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