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에 있어서 하늘은 인격신으로 임금이나 제후보다 더 엄위하고 그 뜻에 따르지 않는데 따라서 상과 벌을 내리는 두려운 존재이며 따라서 하늘은 공경히 받들며 정성껏 제사지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므로 백성들은 묵자에게 모두 열광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묵자의 사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불온사상(不穩思想)으로 낙인 찍혀 강제적으로 소멸되고 그 후 다시는 중국에서 되살아나지 못하였는데, 맹자가 살았을 당시에는 어쨌든 맹자의 한탄처럼 묵적의 이론이 온 천하에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묵자는 근로(勤勞)하고, 절용(節用)한 생활을 스스로 실천하였었다. 자신이 말한 사상을 스스로 실행에 옮겼던 묵자의 실천주의자적 태도는 사마천이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사는 집의 높이는 석자였고, 세 계단의 흙섬돌에다 지붕을 이은 풀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고, 굽은 서까래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다. 흙으로 만든 밥그릇, 국그릇에 거친 곡식의 밥과 명아주와 콩잎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베옷과 겨울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세치 두께의 오동나무로 관을 만들었고 곡도 간략히 하였다.”
이로 인해 ‘여씨춘추’에 기록된 대로 공자와 묵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제자들도 더욱 늘어나 온 천하에 가득차게 되었으며, 온 천하는 묵가와 유가로 양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맹자에게 있어 제1의 주적(主敵)이었다. 맹자가 제자 공도자에게 답변하였던 것처럼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속여 인의를 막아버리는 요사스러운 학설, 즉 묵자의 사설(邪說)’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맹자가 싸울 적은 묵자뿐이 아니었다. 제2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양주, 즉 양자였다. 묵자의 사상뿐 아니라 양주의 학설도 온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자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맹자는 ‘요사스러운 양주와 묵적의 사설을 바로잡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방자한 말을 몰아내 돌아가신 성인들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천적(天敵)들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제2의 천적 양주.
공교롭게도 묵자가 유가에서 파생되었다면 양주, 즉 양자는 노가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묵자가 유가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극대화시켰다면 양자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극대화시켰다. 따라서 묵자와 양자는 심각한 양극단의 대립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양자는 우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겸애론’을 실현 불가능한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보고 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양자는 실현될 수 없는 ‘겸애론’은 혹세무민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있었다.
양자는 오히려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 天下不爲)’라고 부르짖음으로써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부르짖었다.
2005-10-0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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