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입력 2005-01-20 00:00
수정 2005-01-20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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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문서공개를 계기로 또 한번 과거사가 우리들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왔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반갑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에도 냄비처럼 한바탕 들끓다 잦아들어버리는 역사의식을 보여주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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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숙 수석논설위원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과거사를 소화하는 방식 중 베트남의 방식은 독특하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과감하게 미국과 화해하였다. 도이모이 정책에 따라 한국과도 과거사 집착보다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국제사회에서 무시의 대상이기는커녕 경의의 대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전쟁에서 물리치는 용기와 끈기를 보여준 데다 내적으로도 자신들의 기억을 단속하여 분발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곳곳에 있는 월남전 피해 증오비, 위령비 등이 그것을 말한다.

한국인의 과거사 소화방식은 어떤가. 한 역사교육 문제 토론회에서 한 고교 교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왜곡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하였다. 우리 국민은 중국이나 일본이 역사 망언을 해주어야만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지피므로 우리 국민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망언이 자꾸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가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이 타율적이라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체의 주체적 결단 없이,‘때리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팽이’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자극 없이도 스스로 역사의식에서 깨어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학교를 통해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게 우선 시급하다. 이 부분은 역사망언이 나올 때마다 제기됐지만 한때 논의로 끝났을 뿐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회교육을 통한 끊임없는 기억과 실천이다. 학교교육을 넘어 생활속에 역사의식을 체질화하여 판단과 행동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 돕는 곳은 각종 박물관이나 기념관이다. 가까운 곳에 역사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 있다면 주체적 역사의식은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추진하고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은 의미가 있다. 십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강제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노릇을 하고도 위안부 피해의 역사는 사죄와 보상은커녕 우리 사회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갈 뻔했다.1990년 정대협의 발족과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의 잇단 증언으로 일본의 만행은 국제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됐지만 국내엔 아직도 이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만한 공간이 없다. 정대협은 박물관 건립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실천행위란 판단 아래 국민적 모금을 추진하고 있지만 진척이 여의치 않다. 오히려 피해 할머니들이 “다시는 우리가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정부에서 나온 생활안정자금을 쪼개 눈물어린 기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그 할머니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제 우리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는 것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같은 기억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 가나 수없이 볼 수 있는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처럼 작고 많을수록 좋다. 우리보다 뒤늦게 위안부 박물관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타이베이의 경우 시가 건물을 기증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해국가인 일본마저도 시민운동가인 마쓰이 야요리의 유산을 토대로 박물관 건립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의 해다. 가장 많은 위안부피해자를 냈던 한국의 역사기억 작업이 올해는 추진력을 갖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정부는 물론 서울시 등 지자체의 자각도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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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2005-01-2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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