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임신 딸과 첫사랑 간직한 엄마 서로의 생채기 어루만지다/이순원 장편 ‘스물셋 그리고 마흔여섯’

혼전임신 딸과 첫사랑 간직한 엄마 서로의 생채기 어루만지다/이순원 장편 ‘스물셋 그리고 마흔여섯’

입력 2004-01-30 00:00
수정 2004-01-30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이순원의 소설 앨범은 빛바랜 흑백 사진을 들춰보는 듯하다.그리고 그 속은 늘 푸근하다.아늑한 기억을 따스하게 비추며 삶의 근원을 환기시켜온 작가의 감성이 이번에는 모녀(母女)가 나누는 정감어린 공간을 그렸다.

그의 신작 장편 ‘스물 셋 그리고 마흔 여섯’(이가서 펴냄)은 그가 어떤 소재를 고르더라도 그만의 빛깔로 채색할 줄 아는 작가임을 잘 보여준다.작품은 순영과 윤희 모녀가 서로의 속끓이는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핥아주는 이야기를 통해 힘들게 근대화의 시기를 지나쳐온 이 땅의 딸과 그 딸의 딸의 연대기를 어루만진다.딸이 자라면서 데면데면해진 모녀 사이를 더 살갑게 이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각자가 지닌 내면의 상처다.

순영은 고교 3학년 윤희의 변화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충격적 고백을 들은 엄마는 속타는 심정을 추스른 뒤 말한다.“그래.얘기할 수 없었다는 거 알아.엄마도,엄마도 그랬을 테니까.” 이번엔 병실에 누운 딸이 묻는다.“엄마는 이런 적 없었지?”라고.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엄마는 용기를 낸다.“보호자로서의 엄마가 아니라 같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상처를 가진 여자로서의 엄마”가 되기 위해 꼬깃꼬깃 접어둔 아련한 속내를 들려준다.

빈농의 딸인 순영의 첫사랑은 같은 마을 재집(기와집)에 사는 승호.중학교만 마치고 서울 공장에 취직한 그에게 잘사는 집 대학생은 동경의 대상.우연히 만나 밤을 지새우며 모든 것을 허락하기로 했지만 막상 바지가 벗겨지자 남루한 팬티를 보이기 싫어 관계를 거부하면서 끝나버린 가슴아픈 사연을 들려준다.

엄마의 비밀과 상처를 공유한 딸은 ‘위기’를 넘기고 스물 셋으로 성큼 커간다.그러나 고백은 절반이었다.시간이 흘러 딸의 임신이 이종사촌 오빠 기혁과의 ‘금지된 사랑’때문임을 알게 되면서 순영의 혼돈은 커진다.기혁의 아내를 달래며 사건을 무마하자 이번엔 자신의 상처가 덧난다.승호가 돈에 쪼들린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남편 몰래 돈을 꾸어주고 속앓이를 한다.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는 폐암에 걸린 순영이 수술을 받으러 가면서 가라앉는다.딸은 좁은 병실 침대에 누운엄마 품에 안긴다.

작가는 둘의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해 시점을 번갈아 가며 기억 여행에 나선다.때론 같은 사건을,때론 다른 사건을 교차시키면서 교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가는 길에 이 땅에 여성으로 사는 의미도 살짝 건드린다.순영이 종일 밟은 ‘미싱’에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어머니의 삶과 근대화의 그늘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작가는 “두 사람이 살아오고 또 살아가고 있는 서로 다른 시간 속,사랑의 금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그 말대로 ‘스물 셋…’은 이전의 작품처럼 따뜻한 삶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종수기자 vielee@
2004-01-30 2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탈모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1. 건강보험 적용이 돼야한다.
2. 건강보험 적용을 해선 안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