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 총선에서 제1야당 민주당의 대약진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보수,진보 어느쪽인가 하면 다소 진보 냄새를 피우는 시민파 이미지의 소유자.후생상을 지낸 1994년을 빼놓곤 줄곧 야당의 길을 걸어온 자수성가형 정치인.
그런가 하면 마작 자동점수계산기를 발명한 도쿄대 응용물리학과 출신.일본 정계에서 드문 이과계로 변리사 자격증 소지자.아예 헌법을 새로 만들자는 ‘창헌(創憲)’을 공약으로 내건 ‘우익’? 하지만 실은 역사 왜곡교과서 파동이 한창이던 2001년 ‘새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에 “비겁한 정치집단”이라며 싸움을 걸기도 했다.
간 나오토(管直人·57) 민주당 대표는 이런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인물이다.그는 개표가 시작된 직후인 9일 밤 8시30분쯤 “좋은 싸움을 했다.”고 일찍이 ‘승리선언’을 했다.예감은 적중했다.중의원 해산 때보다 무려 40석을 늘렸다.
선거 때는 “정권교체,200석 확보”의 목표를 세웠다.그러나 실제로는 “30석 늘리면 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간 대표의 승부사 기질은총선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가는 곳마다 조직을 분열시킨 ‘파괴꾼’으로 유명한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 당수와 손을 잡았다.“위험하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밀어붙였다.그리고 성공했다.정책선거,정권선택의 선거라는 슬로건으로 흡사 일본 국민들을 대통령을 선택하는 듯한 착각에 빠뜨려 “고이즈미 아니면 간 나오토”라는 양자택일로 몰고 간 것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인기는 유세에서 잘 나타났다.고이즈미 총리가 지원연설한 81명 가운데 59.2%가 당선됐으나 간 대표의 지원을 받은 80명중 87.6%가 당선됐다.숙명의 라이벌에게 압승을 거둔 셈이다.
대학졸업 후 변리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71년 ‘보다 좋은 주택을 원하는 시민모임’을 비롯,시민운동에 발을 내딛는다.15년간의 시민운동 경험을 살려 정계입문을 시도했으나 3차례 낙선.1980년 간신히 금배지를 달았다.그때가 34세였다.
정계에 들어서 승승장구,자민·사회·사키가케의 연정 때는 후생상으로서 각료경험도 쌓았다.1996년 하토야마 유키오 의원과 지금의 민주당을 결성,번갈아 당 대표를 지내다 당 재건의 임무를 띄고 지난해 다시 대표에 취임했다.
흠집이라면 두가지 꼽힌다.1998년 주간지에 폭로된 미모의 전직 TV캐스터와 불륜 스캔들.당시 “야당 당수 중 총리가 됐으면 하는 후보”였던 그에겐 큰 타격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 세습을 비난하던 그가 아들을 고향인 오카야마에 출마시킨 것.아들 겐타로는 결국 낙선했지만 “한입으로 두말 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런 흠집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의 고이즈미 총리처럼,민주당에는 간 대표 외에 별 대안이 없다.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재격돌할 고이즈미 대 간의 승부에서 간 대표가 다시 웃을 수있을지 벌써부터 관심거리다.
marry01@
그런가 하면 마작 자동점수계산기를 발명한 도쿄대 응용물리학과 출신.일본 정계에서 드문 이과계로 변리사 자격증 소지자.아예 헌법을 새로 만들자는 ‘창헌(創憲)’을 공약으로 내건 ‘우익’? 하지만 실은 역사 왜곡교과서 파동이 한창이던 2001년 ‘새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에 “비겁한 정치집단”이라며 싸움을 걸기도 했다.
간 나오토(管直人·57) 민주당 대표는 이런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인물이다.그는 개표가 시작된 직후인 9일 밤 8시30분쯤 “좋은 싸움을 했다.”고 일찍이 ‘승리선언’을 했다.예감은 적중했다.중의원 해산 때보다 무려 40석을 늘렸다.
선거 때는 “정권교체,200석 확보”의 목표를 세웠다.그러나 실제로는 “30석 늘리면 잘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간 대표의 승부사 기질은총선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가는 곳마다 조직을 분열시킨 ‘파괴꾼’으로 유명한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 당수와 손을 잡았다.“위험하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밀어붙였다.그리고 성공했다.정책선거,정권선택의 선거라는 슬로건으로 흡사 일본 국민들을 대통령을 선택하는 듯한 착각에 빠뜨려 “고이즈미 아니면 간 나오토”라는 양자택일로 몰고 간 것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인기는 유세에서 잘 나타났다.고이즈미 총리가 지원연설한 81명 가운데 59.2%가 당선됐으나 간 대표의 지원을 받은 80명중 87.6%가 당선됐다.숙명의 라이벌에게 압승을 거둔 셈이다.
대학졸업 후 변리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71년 ‘보다 좋은 주택을 원하는 시민모임’을 비롯,시민운동에 발을 내딛는다.15년간의 시민운동 경험을 살려 정계입문을 시도했으나 3차례 낙선.1980년 간신히 금배지를 달았다.그때가 34세였다.
정계에 들어서 승승장구,자민·사회·사키가케의 연정 때는 후생상으로서 각료경험도 쌓았다.1996년 하토야마 유키오 의원과 지금의 민주당을 결성,번갈아 당 대표를 지내다 당 재건의 임무를 띄고 지난해 다시 대표에 취임했다.
흠집이라면 두가지 꼽힌다.1998년 주간지에 폭로된 미모의 전직 TV캐스터와 불륜 스캔들.당시 “야당 당수 중 총리가 됐으면 하는 후보”였던 그에겐 큰 타격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 세습을 비난하던 그가 아들을 고향인 오카야마에 출마시킨 것.아들 겐타로는 결국 낙선했지만 “한입으로 두말 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런 흠집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의 고이즈미 총리처럼,민주당에는 간 대표 외에 별 대안이 없다.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재격돌할 고이즈미 대 간의 승부에서 간 대표가 다시 웃을 수있을지 벌써부터 관심거리다.
marry01@
2003-11-11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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